우난순의 식탐
2019-12-18
'어르신들, 제가 엿듣고 있다는 거 아시죠?' 대구 살을 쩝쩝 씹으며 옆자리 식탁을 힐끗 쳐다봤다. 일행 중 한 할아버지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거기까지였다. 왜냐면 할아버지 마나님이 맞은 편 동생부부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서울서 내려온 자매 부..
2019-11-27
차는 커녕 운전면허증도 없는 원시인 체질이어서 식구들이나 친구들한테 면박을 당하기 일쑤다. 차가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 궁시렁 궁시렁…. 다행인지 여태까지 회사 근처에서 산다는 이유로 굳이 차가 있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갈 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2019-11-06
하루는 밤 11시가 넘어서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순대국밥 먹으러 가자는 거였다. 이 시각에 웬 순대국밥인가 하면서 따라 나섰다. 문창동 대전천변에 있는 식당인데 상호가 '농민식당'이었다. 멀리 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시골 깡촌의 농민의 딸이었던 나는 식당 이름이 일단..
2019-10-16
세상 밖으로 나서기엔 이른 새벽. 먼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어둠을 헤치고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이웃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된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기운이 폐부 깊숙이 들어가 밭은 기침이 나왔다. 간밤에 발작적인 기침으로 잠..
2019-09-25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면 나는 시장에 간다. 그것은 땅거미 질 무렵 둥지를 찾아 돌아오는 새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인정이 몹시 그리워 시장 구석구석을 기웃거린다. 대전 중앙시장은 내 살아온 날들의 추억이 배어 있다. 고향을 일찍 떠나 터를 잡은 대전에..
2019-08-28
문득,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렸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속 시원히 알 수가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제의 세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모든 뿌리에서, 그 뿌리를 키울 토지에서조차 떠나 있는 나는 온갖 시대를 둘러보아도..
2019-08-07
아, 또 폭염이 들이닥쳤다. 여름을 좋아하지만 폭염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작년 이맘 때 회사에서 점심 시간에 지인 장례식장에 갔다가 길에서 졸도할 뻔 했다. 이글거리는 햇볕이 불에 달군 인두가 살을 지지듯 뜨겁고 아팠다. 그런데 건물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이 벽돌을 등에..
2019-07-17
손바닥만한 구두 속에서 하루종일 구겨져 있던 발을 꺼낸다. 열 개의 발가락을 쫙 펴고 스트레칭한다. 허물을 벗듯 블라우스, 스커트를 훌훌 벗는다. 온 몸을 옥죈 갑옷을 벗어 내려놓은 기분이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거실에서 큰 대자로 벌러덩 눕는다. 물 먹은 솜처럼..
2019-06-26
해남 미황사를 병풍처럼 두른 달마산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가 안개로 뿌옜다. 땀으로 범벅된 몸으로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 8시부터 가파른 산을 오른 탓에 위장에선 아우성 소리가 요란했다. 배낭에서 바게트 빵을 꺼내 정신없이 먹었다. 물기도 없고 질겨서..
2019-06-05
내가 일하는 미디어부엔 고향이 서산인 동료가 있다. 전산 담당인데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눈코입이 손톱으로 콕 찍은 것처럼 작고 귀여워 겨울엔 찐빵 같고 이때 쯤엔 하지 감자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친구가 보기 드문 효자다. 철마다 부인과 휴가내서 가을 추수, 김장,..
2019-05-15
계절의 여왕 5월 첫 주말 옥천에 갔다. 대전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옥천읍에서 내려 다시 청산 가는 마을 버스를 탔다. 청산은 생선국수로 유명한 곳이다. 4월에 생선국수 축제도 열린다. 마침 옥천 장날이라 버스는 노인들로 꽉 찼다. 오전 10시 40분 차였는데 벌써..
2019-04-24
처음 봤을 때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책에 실린 이 그림을 본 순간, 내 안에 잠재된 어떤 감정을 건드리는 느낌이어서 당혹스러웠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과 두 손으로 귀를..
2019-04-03
대전 대사동에는 금요장터가 있다. 금요일마다 농협 주위에 장이 선다. 대전 근교에서 농사짓는 주민들이 채소, 과일 등을 가져와 판다. 직거래인 셈이다. '장돌뱅이'들도 온다. 금요일만 되면 그곳은 북적북적 5일장을 방불케 한다. 난 금요일이 휴무라 장도 보고 그곳에 단..
2019-03-14
스무 날 가까이 미세먼지 속에서 살았다. 독성이 가득한 부유하는 안개의 도시에 갇혀 생존의 문제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산다는 것은 행복인가, 불행인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인간의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뿐, 멈추지도 않고 더구나 뒤를 돌아보는 건 어리..
2019-02-20
졸린 눈을 비비며 목포 터미널 대합실에 들어섰다. 대합실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으로 목을 축이는데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이 지긋한 남자의 구성진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노래더라? 멜로디는 익숙한데 선뜻 감이 안 잡혔다. '머나먼 저 하늘만 바라보고..
2019-01-30
우리는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친구한테 온천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할 줄 알았다. 워낙 낯가림이 있어 쑥스러움을 타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온양온천 어때?" 넌지시 제안을 하자 친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오케이!" 알고 보니 친구도 온..
2019-01-09
새벽 5시 50분.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차 시간에 늦을까봐 초조했는데 다행히 와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일찍 어디 가시나요?" 인상이 깔끔한 초로의 신사 분위기의 택시기사가 물었다. 통영에 물메기탕 먹으러 간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반색을 했다. "나도 가..
2018-12-19
한 해가 막 저물 무렵,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이 막바지 뒷심을 발휘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산고 끝에 말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의 생일은 너나없이 즐거운 날이다. 교회나 성당에 안 다녀도 이 날은 으레 아이가 있는 집이나 연인들은 성탄절을 핑계삼아 외식하는 날 아니겠냐..
2018-11-28
한 자리에서 라면 6개를 끓여 후루룩 마시다시피하는 강호동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나름 대식가에 속한다. 음식 앞에서 질보다는 양을 따지는 편이다. 어쩔 수 없는 습성이다. 어릴 적엔 엔간히 음식투정을 부렸지만 고등학교 때 자취생활 하면서 그 버릇이 싹 없어졌다. 대학생..
2018-11-07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미역국에 넣는 고기는 소고기나 닭고기 정도다. 내가 어릴 적엔 집집마다 돼지며 소, 닭 등 가축을 키웠다. 닭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거나 볍씨, 싸라기를 먹으며 컸다. 이렇게 자란 닭을 잡아 미역과 함께 끓이면 둘이 먹다 하나가..
2018-10-17
지역마다 향토음식이란 게 있다. 전주비빔밥, 병천순대국밥, 안동찜닭, 구즉묵밥, 강릉초당두부, 부산 돼지국밥. 그 지역에 가서 먹어보면 과히 실망하지 않는다. 괜히 소문난 게 아니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요즘은 전국 어디서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향토음..
2018-09-26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청명한 계절에 맞는 한가위. 낼 모레면 50 중반을 바라보는데도 명절만 되면 아직도 설렌다. '이쁜이 꽃분이 모두 다 반겨주는데~'.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한달음 달린다. 뭐 기혼여성들은 머리 깨나 아프겠지만 말이다. 집 떠나 객지생활..
2018-07-20
나는 수박을 먹는다. 체질상 추위를 많이 타는 이유로 겨울은 딱 질색이다. 나에게 겨울은 그야말로 인고의 계절이다. 하여 여름이 오면 내 세상인 셈이다. 옷 입기도 간편하고 무엇보다 수박이 나오는 계절 아닌가. 참외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찾지 않는데 수박이라면 사..
2018-05-04
난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이다. 싫은 것도 많지만 좋은 것 또한 많다. 난 떡을 아주 좋아한다. 냉장고 냉동실엔 늘 떡이 쌓여 있다. 팥떡, 콩떡, 영양떡 등. 때때로 전문 떡집에 한 박스 주문해 냉동실에 넣어 두고 아침 식사용으로 먹거나 산에 갈 때 몇 개씩 싸 갖..
2018-03-23
일요일 퇴근 길 용두시장 주택가를 지나다 정겨운 장면을 만났다. 대문 앞에서 아주머니가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탄성을 지르며 발걸음을 멈췄다. 지칭개라는 봄나물이었다. 풍년초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물을 뒤적이면서 어디서 뜯었냐고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