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 제공 |
데이비드 흄은 감정은 이성을 앞선다고 했다. 당연히 감정보다 앞서는 건 본능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아무리 잘난 척 해도 동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데 나 살기 급급해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아버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냥 멍했다. 통곡해도 시원찮을 판에 달디 단 참외를 맛있게 먹고, 새콤한 멍가 열매도 따먹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나 자신이 부조리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정녕 죽음은 개인의 몫인가. 가족의 첫 죽음인 큰언니 때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 끼니 때마다 국에 밥말아 배불리 먹었다. 당시 '이건 뭘까'라고 생각하며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비로소 죽은 이의 부재를 실감하며 상실감에 시달렸다.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까탈스런 성격과 뭐든 잘먹는 먹성이 그렇다. 나이 50을 훌쩍 넘은 요즘은 자주 아버지를 거론하게 된다. "아버지 체질을 닮았나봐요.", "아버지가 잘 드시는 데도 살이 안 찌시거든요." 주말에 어쩌다 청양 집에 가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 배고파. 엄마 밥 언제 먹어?"라며 수선을 떤다. 그러면 엄마는 "넌 맨날 배고프다고 하니"라며 혀를 끌끌 찬다. 한번은 명절 때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돼서 접시에 명태전, 가지전, 동그랑땡 등 부침개를 접시에 담아 거실로 갔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쩝쩝거리며 먹는데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가 한마디 했다. "넌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니?" 회사에서도 일하다 배가 고파지면 먹는 상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두툼한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으면 기가 막힌데, 초코파이는 언제 먹어도 살살 녹아, 저녁에 매콤새콤한 비빔국수나 해 먹을까?
철없던 시절, 난 아버지를 죽어라 미워했다. 반항적이고 예민한 사춘기 땐 무조건 아버지가 싫어 밥상 앞에서 고개를 외로 꼬고 먹었다. 몇 년 키우던 개를 팔고 뒤꼍에서 몰래 우는 아버지를 봤을 때도 단지 나약한 인간같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상흔은 아버지의 깨지기 쉬운 영혼을 오랜 세월 괴롭혔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객지생활한다는 핑계로 무심한 딸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가끔 집에 갈 때 빵이나 과자 정도로 생색낼 뿐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셨다. 대신 밥 잘 드시고 떡, 빵 등 주전부리를 좋아했다. 언젠가 유성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사 간 찹쌀도넛을 아버지는 맛있게 드셨다. 진작에 맛난 것 자주 사다드릴 걸, 풍수지탄이다. 아침밥 잘 드시고 돌아가신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그나저나 아버지 기일 제사상에 당신이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자면 상다리가 휘어질텐데 어쩌지?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