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순대국밥보다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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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순대국밥보다 우정

  • 승인 2019-11-06 13:37
  • 신문게재 2019-11-07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순대
하루는 밤 11시가 넘어서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순대국밥 먹으러 가자는 거였다. 이 시각에 웬 순대국밥인가 하면서 따라 나섰다. 문창동 대전천변에 있는 식당인데 상호가 '농민식당'이었다. 멀리 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시골 깡촌의 농민의 딸이었던 나는 식당 이름이 일단 맘에 들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는데 식당 밖 테이블에선 거나하게 취한 남자들이 순대국밥 국물을 떠먹으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진한 동물성 냄새가 진동했다. 돼지 창자 특유의 독한 누린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코를 쥐었다. 식당은 테이블이 서너 개 밖에 안될 정도로 협소했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사골 국물은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활화산 같았다. 투가리며 수저, 젓가락, 테이블 등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이 돼지 기름으로 미끌거렸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갈 것 같은 위생 수준이었다.

그날 먹은 순대국밥에 매혹당한 나는 밤만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질질 흘렸다. 그 강력한 맛을 못 잊어 난 친구를 졸라 하이에나처럼 밤 거리를 더듬거리며 농민식당을 찾아갔다.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순대국밥이었다. 노란 기름이 엉겨 붙은 진한 국물은 아지노모도처럼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드나들다 어느날 발길을 딱 끊었다. 너무 자주 먹어 질려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 그 식당이 없어졌다는 얘길 듣고 상심이 컸는데 지난해 부사동으로 이전했다고 해서 가봤다. 상호만 그대로일 뿐, 으리쌈쌈한 건물에 입술에 아교처럼 들러붙었던 진한 그 맛은 없었다.

지난 토요일에 대학 동기 4명이 1년 만에 뭉쳤다. 이번엔 천안 사는 친구가 병천 순대 먹고 독립기념관 단풍 구경 가자며 우리를 태우고 병천으로 달렸다. 친구는 TV에 나온 곳이라며 특별히 맛있다는 식당으로 끌고 갔다. 과연 식당 밖에선 대기하는 손님들이 100m 조금 안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빨리 먹고 싶어 초조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TV에서 보고 온 모양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입성, 식당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모둠순대 하나에 국밥을 시켰다. 우리는 옆 테이블 사람들과 많이 먹기 내기라도 하듯 전의를 불태우며 순댓국에 밥을 말았다. 그런데 순대국밥이 이 맛도 저 맛도 아니었다. 역시 소문난 잔치 먹을 거 없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소개한 친구의 성의를 봐서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수저질을 하는데 양이 줄지 않았다. 천안 친구가 머쓱해하는 걸 본 나는 모둠순대를 먹으며 위로 차 한마디 던졌다. "이 순대 맛있다 잉."

병천 순대의 지존은 아닌 것 같은 순대를 먹었지만 우리는 열여덟 여고생들처럼 마냥 즐거웠다. 독립기념관 단풍 길을 걸으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까르르 까르르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으며 야단법석을 피웠다. 난 얼굴이 커서 뒤에 서겠다, 너 눈 감아서 다시 찍어야 한다, 다리 길게 나오게 찍어라…. 나이만 먹었지 하는 짓이 영락없이 철부지 소녀들이었다. 한 친구의 결혼은 우리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얘깃거리다. 만난 지 석달 만에 손도 안 잡아 보고 결혼하고 서툴렀던 신혼 첫날 밤 에피소드를 아는 우리는 친구를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라며 골려대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얘기로 손뼉을 치며 배꼽을 잡았다. 친구는 볼 빨간 얼굴로 "내가 어떻게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는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묵은 장맛이라고, 서로 가릴 게 없이 무장 해제되는 30년이 훌쩍 넘은 친구 사이이기에 가능했다. 문득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친구가 생각난다. 심야의 농민식당에서 우정을 나누며 순대국밥을 먹었던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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