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총총히 빛나는 별이 나의 길을 동행했다. 만지면 베일 것 같은 손톱달도 시커먼 산등성이에 걸려 있었다. 먼동이 트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남쪽 땅끝은 나에겐 해방의 공간이다. 해가 바뀌면 으레 통영이 그리워진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둥지에 들어오면 눈도 안뜬 새끼가 입을 쩍 벌리는 것처럼 말이다. 윤이상과 박경리의 고향 통영. 먹을 것이 그득한 풍요의 해안도시. 몇 년 전 2월에 갔을 때 물메기탕을 찾았으나 너무 늦게 왔다며 한 겨울에 오라는 말을 들었다.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통영은 뺨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달랐다. 살을 에는 시베리아 한파가 여기선 맥을 못추는 모양이다. 이젠 통영이 오랫동안 살아온 것처럼 익숙하다. 서호시장 사람들도 낯이 익어 고향 사람 같다.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배가 고파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직 준비가 안됐다며 12시에 오라고 해서 다시 들르겠다고 하고 시장구경에 나섰다. 내륙에선 볼 수 없는 싱싱한 생선들이 좁은 대야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군함처럼 거대한 대구들은 배가 쩍 갈린 채 척추뼈를 드러내고 햇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갓 잡아온 생선들은 오늘 어느 식탁에서 생을 마감하려나. 물고기들의 숙명과 나의 숙명은 어떻게 다를까.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은행에 돈을 찾으러 들렀다 시간이 남아 쉴 요량으로 소파에 앉았다. 전원생활을 다루는 월간지가 있길래 집어 들었다. 곽재구 시인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그가 20대 중반에 쓴 '사평역에서'는 내 젊은날 부러움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킨 시였다. 기사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바람, 꽃, 강물, 시간, 사람들의 웃음소리, 음식냄새, 이것들이 다 내 도반이다."
다시 찾은 식당은 조용했다.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다른 데로 가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배낭을 내려놓고 TV를 켰다. 식탁 위에 놓인 뻥튀기도 갖다 먹었다. 뭐라도 먹어서 내 위장의 히스테리를 잠재워야 했다. 한참 후에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오메, 진짜 왔네예." 물메기탕이 드디어 나왔다. '뱃놈'들이 먹을법한 냉면 그릇에 나올 정도의 양이었다. 맑은 국물이 시원하고 담백했다. 뽀얀 물메기 살은 흐물거려서 씹을 새도 없이 꿀러덩 넘어갔다. 콧물을 훌쩍이며 국물까지 다 먹었다. 주인은 남편이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를 팔면서 식당도 했다. 모름지기 사내는 밖에 나가서 가족에게 먹일 먹을 거리를 물어와야 하는 법이다. 주인은 올해는 물메기가 안잡혀 값이 올랐다며 미안해했다. 작년 겨울엔 EBS '한국기행'에도 나왔단다. 주인 부부가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을 찍었다고 한다. 그 뒤로 여러 곳에서 출연해 달라고 연락이 왔지만 다 사양했다고 한다. 성가시고 하루 공치는 바람에 손해만 봤기 때문이다. "다음엔 회덮밥 먹으러 올게요."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