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미술관 앞 육개장집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미술관 앞 육개장집

  • 승인 2019-04-24 10:54
  • 신문게재 2019-04-25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육개장
처음 봤을 때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책에 실린 이 그림을 본 순간, 내 안에 잠재된 어떤 감정을 건드리는 느낌이어서 당혹스러웠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과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입을 벌린 해골같은 인물. 금방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절규'는 다른 그림들과는 달랐다. 악몽을 마주하는 듯한, 마성의 괴기스러움이 존재했다. 미술작가는 종종 또다른 작가들의 찬미의 대상이 되곤 한다. 릴케의 『릴케의 로댕』과 장 주네의 『자코메티의 아틀리에』가 그렇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는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보고 『세잔의 산을 찾아서』라는 기행집을 썼다. 한트케는 화가의 산을 찾은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단 한번도 무엇인가에 이끌려본 적이 없는 삶, 그러나 너무도 쉽사리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생트빅투아르 산이었다."

지난 주 금요일 청주에 갔다. 지난해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개관했다. 담배공장을 리모델링한 청주관은 과천, 덕수궁, 서울에 이어 네 번째 국립현대미술관 분점이다. 기차로 오송역까지 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미술관 앞에 서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규모가 꽤 큰 웅장한 건물이었다. 흰색의 외관이 현대적이어서 멋들어졌다. 청주관은 수장형 미술관이다. 작품 보관과 함께 관객에게 개방도 하는 곳이다. 1층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진천의 고등학교에서 단체 관람 왔단다. 안내 데스크에서 시끄러우니까 5층부터 관람하면서 아래로 내려오라고 조언했다. 여긴 많은 작품이 수장돼 있어 훼손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 물도 물론이다. 곳곳에선 공기청정기가 가동 중이었다.

작품은 다양했다. 영상, 그림, 조각, 설치미술 등 현대미술을 아울렀다. 물건을 진열해 놓은 듯한 창고형 미술관이어서 특이했다. 미술품이 복원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아는 작가가 있어 반가웠다. 백남준, 권진규, 이불, 최종태 그리고 임흥순. 임흥순의 다큐 영화 '위로공단'은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을 수상해서 화제가 됐었다. 작가는 봉제공장 시다로 40년을 일한 어머니가 이 작품의 모티프라고 했다. 한 시간이 넘는 영상을 보면서 예술과 사회성의 관계를 생각했다. 순수예술과 참여예술은 각자 가치가 있다. 허나 현실을 반영한 예술은 가슴을 울린다. 작가 김훈은 화가 오치균의 그림에 경도돼 그와의 대화를 글로 썼다. 오치균은 고향 강원도 사북에 천착한 화가다. 한줄기 온기도 느낄 수 없는 검은 마을 사북을 그린 오치균은 "길들여지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 나는 세상과의 관계를 매끈하게 유지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1층까지 보고나니 오후 2시가 넘었다. 뱃속에서 화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술관 밖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대로변에서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식당이 안보였다. 가지를 뎅강뎅강 잘라놓은 플라타너스 가로수만 보였다. 몸통만 남은 나무가 영락없이 토르소 같다. 골목으로 들어가 주민인 듯한 아저씨에게 물었다. "저 식당 가보쇼. 설렁탕, 육개장집인데." 밥때가 지나서 식당은 한가했다. 육개장을 시켰다. 어라? '육개장이 거기서 거기지 뭐'라고 기대를 안했는데 맛있었다. 국물이 풍미가 있으면서 담백했다. 대개의 육개장은 고춧가루를 들이부은 것처럼 뻘겋고 맵다. 이 집 육개장은 품격이 있고 느끼하지도 않았다. 고슬고슬한 쌀밥도 한몫 했다. 이만하면 금상첨화다. 모름지기 밥집은 밥이 맛있어야 한다. 반찬이 훌륭해도 밥이 후지면 안 가게 된다. 육개장을 먹고 나와서 미술관을 바라보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땐 뭘 먹을까?
우난순 기자 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3.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