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이방인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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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이방인의 식탁

  • 승인 2019-08-28 10:39
  • 신문게재 2019-08-29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음식
문득,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렸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속 시원히 알 수가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제의 세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모든 뿌리에서, 그 뿌리를 키울 토지에서조차 떠나 있는 나는 온갖 시대를 둘러보아도 좀처럼 드문, 참으로 그런 인간이다… 나는 이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며, 기껏해야 지나가는 객이다." 츠바이크는 가장 흉포한 야만의 시대에 유대인이라는 화인을 몸에 새긴 채 유랑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나는 배낭을 꾸렸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 내일도 다르지 않을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인생. 나를 옥죄는 뻔한 일상에 진절머리 났다.

안산 외국인 거리에 갔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낯선 도시의 거리는 생경했다. 낯선 말과 글자, 낯선 얼굴과 몸, 낯선 피부색. 여기에선 내가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이방인과 이방인의 만남. 이국의 어느 후미진 골목에 하루살이같은 인생을 저당잡힌 이주민의 주름진 이마가 고단한 삶을 말해줬다. 거리엔 여러나라의 국기가 태극기와 함께 펄럭였다. 'We Are The One'. 공원 입구 돌판에 새겨진 문구다.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가게 간판은 온통 한자와 동남아 글씨로 도배됐다. 슈퍼엔 바다 건너 온 조악한 물건들이 쌓였다. 배불뚝이 남자들이 목에 번쩍이는 금목걸이를 하고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요란한 문신과 멋들어진 헤어스타일을 한 이국적인 청년들은 어디론가로 바삐 걸어갔다. 자유분방하고 과감한 분위기가 날 압도했다.

중국 시안에서 온 싹싹한 청년 김은동씨는 한국어 학원을 하다 사스 땜에 망하고 안산까지 왔다. 지금은 정육점에서 일하는데 몇 년 열심히 돈 벌어서 다시 시안으로 갈 거란다. "시안 놀러 오세요. 진시황 병마용 있어요. 한국에서 비행기로 두시간 반밖에 안 걸려요." 은동씨가 알려준 태국 식당으로 가다 '사마르칸트'가 보여 맘을 바꿔 거기로 들어갔다.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도시로 실크로드 교역지였다. 내가 꿈꾸는 도시 사마르칸트! 식당 밖에선 남자 종업원이 화덕에 빵을 굽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손님은 중년 남자 혼자였다. 주방장이 나왔다. 면도로 민 턱이 파르스름한 주방장한테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주방장은 손을 벌리며 우리말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와 주방장의 불통에 밥먹던 중년 남자는 답답했던지 통역을 해줬다. 타지키스탄 사람인데 한국 말을 약간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주방장이 양갈비와 소고기볶음밥을 가리키며 '삼사'라는 만두와 비슷한 빵도 권했다. 내가 소고기볶음밥과 삼사를 먹겠다고 하자 통역자는 소고기볶음밥은 혼자 먹기엔 양이 많다고 했다. 단골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먹겠다고 우겼지만 주방장이 반만 먹으라고 해서 흥정은 바로 끝났다. 젠틀맨 통역자가 양꼬치를 먹고 나가면서 나에게 눈 인사를 건넸다.

소고기볶음밥과 삼사를 먹으며 한국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외로움을 생각했다. 이들도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으로 고군분투할 것이다. 사실 도처에서 느끼는 소외의 감정은 보편적이다. 미국의 한국 이민자들과 한국의 이주민들. 경계선상에서 긴장한 채 사는 현대인이 어디 이들 뿐일까. 음식은 고향의 정서다. 연변에서 온 강기석씨(71)는 대전·공주에서 정화조 일을 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 병을 얻어 안산으로 올라와 근근이 산다. 고기를 좋아하는 강씨는 이젠 돈을 벌지 못해 맛있는 고기도 자주 못 사먹는다. 그는 고향 장마당에서 산 돼지고기에 배추를 넣어 볶으면 얼마나 맛있는지를 한참 얘기했다. 이들의 건투를 빈다.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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