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세종대왕이 야채수프를 먹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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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세종대왕이 야채수프를 먹었더라면

  • 승인 2019-01-30 14:15
  • 신문게재 2019-01-31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수프
게티이미지 뱅크 제공
우리는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친구한테 온천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할 줄 알았다. 워낙 낯가림이 있어 쑥스러움을 타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온양온천 어때?" 넌지시 제안을 하자 친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오케이!" 알고 보니 친구도 온천 마니아였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와는 오래된 사이지만 여행 한번 함께 간 적이 없다. 멀리 살고 있고 여행 취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친구는 어쩌다 까다로운 식성의 소유자가 됐다. 고기를 안 먹는단 말씀이다. 과연 우리의 온천여행은 순탄할까. 온천은 수정같이 맑았다. 지옥의 유황불로 지핀 온천 물 속에서 두 여자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열락에 들뜬 표정으로 나른함에 젖었다. 인생의 즐거움은 거창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홀딱 벗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물장구 치며 노는 이 순간 더 바랄 게 뭐가 있을까.

압권은 히노끼탕이었다. 이름하여 노천탕이다. 히노끼는 편백나무를 말하며 일본에선 예로부터 신성시하는 나무다. 우리는 40도의 따끈한 물에 명치까지 담갔다. 가슴 위는 바깥세상에 노출시키고 겨울을 만끽했다. 물에선 뽀얀 김이 피어오르고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은 상고대가 되기 직전이었다. 눈이 내리면 금상첨화겠지만 하늘은 그지없이 파랬다. 처음엔 추워 몸을 웅크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뻣뻣한 사지가 녹작지근하게 풀렸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서정과 노스탤지어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눈도 없었고 시마무라도 보이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과 같은 것.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히노끼탕에서 나온 우리는 각자의 길을 나섰다. 친구는 사우나를 들락거릴 참이고 난 수영장으로 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수영복을 꺼내 입은 나를 본 친구는 경악했다. "어머머, 비키니야?" 얼굴까지 빨개지며 깔깔거리는 친구는 수영복 끈을 묶어주며 잘 놀다 오라고 격려해줬다. 뭐, 서양 여자들은 늙고 뱃살이 출렁거려도 잘 만 입던 걸. 주책바가지 아줌마 소릴 들어도 상관없단 말이지. 실내·외 풀장은 꽤 넓었다. 물 반 사람 반이었다. 다행히 둥둥 떠다니는 때는 안보였다. 몸을 바짝 붙이고 유영하는 청춘남녀들이 사람들 눈을 피해 뽀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니 저것들이?' 옛 사람들은 온천을 치료 목적으로 찾았다. 조선의 왕들은 요양 차 온천을 많이 다녔다. 학구적이고 성실한 세종은 고기를 탐했다고 한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운동부족도 문제였다. 결국 비만한 몸은 당뇨병과 관절염 등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신세가 됐다. 온양 등 전국의 온천에서 효험을 본 세종은 온천을 너무 자주 찾는 바람에 신하들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식탐이 많은 세종만큼 나 또한 먹는 거에 목숨 거는 타입이다. 맛있게 먹은 기억은 내 삶을 강렬하게 관통한다. "난 음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어." 반면에 친구는 딱히 맛있는 게 없다. 그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는다. 먹는 게 귀찮아 차라리 음식 대신 알약으로 먹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다. 너무 안 먹어서인지 온천에서 사우나를 하고 나와 쓰러지기까지 했다. 청빈한 수도사 같은 친구와 형이하학적인 즐거움을 좇는 나의 별난 우정. 간헐적 단식까지 시작한 친구를 놔두고 난 호텔 조식을 푸짐하게 먹었다. 옛 왕들이 머물던 온양행궁 터에서 야채 수프에 모닝 빵을 찍어 먹던 그날 아침의 기억도 내 머릿속에 애틋하게 저장될 것이다. 진한 수프 향이 생각날 때마다 침샘이 사정없이 터질 것도 분명하다. 고기도, 장어도 먹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공주 가는 차 안에서 행복했던 온천욕을 벌써 그리워했다. '흰눈 내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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