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명절이어도 일가친척 왔다갔다 하지 않는 게 세태인 것 같다. 우리 집도 친척이 없어 식구들끼리 밥 먹고 성묘갔다 오는 게 전부다. 점심 먹고 하품 한 두번 하다 으레 늘어지게 낮잠 한번 자야 명절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반면 뱃속에 거지가 든 나는 생쥐 풀 방구리 드나들 듯 부지런히 주방을 들락거린다. 올 추석도 음식이 진수성찬이다. 눈이 짓무르도록 TV를 보다 접시에 전을 이것저것 담아와 거실에서 두 다리 쭉 뻗고 먹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훤히 보이는 들판은 곧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거실 한 켠에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자릴 잡았다. 365일 한가위만 같으면 원이 없겠다. 여하튼 동그랑땡, 단호박·가지·버섯·명태전 등 먹을 게 쌓였다. 그 중 돼지고기 간 것을 듬뿍 넣고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한 동그랑땡에 손이 자꾸 간다. 냠냠 쩝쩝. 옆에서 엄마가 그런 날 물끄러미 보더니 한 마디 한다. "넌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니?"
어릴 적 명절 날 아침 우리는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의례적으로 가야 하는 일이었지만 썩 즐겁진 않았다. 일단 큰아버지가 어렵고 불편했다. 큰아버지의 괴팍한 성격은 동네에서 소문났다. 거기다 자린고비여서 도대체가 돈 쓸 줄을 모르는 분이었다. 못살던 예전 어른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큰아버진 유별났다. 오래된 집이 하도 누추하고 좁아서 자식들이 집을 새로 짓자고 성화였지만 돌부처 저리가라 꿈쩍 안했다. 추석날 아침 제사지내고 큰아버지, 아버지, 오빠들은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 방이 워낙 좁아 온 식구가 같이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자들은 윗방에서 먹어야한다. 그런데 윗방은 손바닥만큼이나 작다. 콩알만한 전구가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린 윗방은 컴컴한 동굴이나 다름없다. 오래된 이불보따리, 이런저런 물건들이 들어차서 쾨쾨한 냄새도 난다.
차디찬 방바닥은 고릿적에나 볼 수 있는 빳빳한 장판이 깔려 있다. 우리는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다 밥상에 둘러 앉는다. 말소리 크게 내는 걸 질색하는 큰아버지 안 들리게 여자들은 소곤소곤 키득거리면서 그제서야 제삿밥을 먹는다. 멀리서 보면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과 영락없다.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조악한 밥상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구차하게 밥먹는 모습이 떠오른다. 무나물, 고사리 볶음, 전, 홍어무침 등과 탕국. 그런데 큰어머니의 탕국은 언제나 맛있었다. 명절에나 먹어본 소고기 탕국. 그땐 돼지고기도 귀해서 어쩌다 먹을 수 있었다. 하물며 소고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맛이 어떤지 사실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귀해서 맛있고 큰어머니의 손맛이 남달랐다. 아마 간장 맛이 특별한 것 같기도 하다. 음식은 베이스가 중요하다. 장 맛이 좋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젠 명절에나 먹는 고기가 아니다. 사시사철 물리게 먹는 게 고기란 말씀이다. 흔해서 그런지 예전처럼 맛있는 줄을 모르겠다. 뭐든 조금 부족해야 갈망하게 된다. 남녀간의 사랑처럼 말이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맛있는 탕국 먹을 일도 없어졌다. 호랑이 큰아버지의 땡 고함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서럽고 그리운 법이다.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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