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내가 먹는 것이 나를 증명한다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내가 먹는 것이 나를 증명한다

  • 승인 2019-03-14 08:34
  • 신문게재 2019-03-14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냉이국
스무 날 가까이 미세먼지 속에서 살았다. 독성이 가득한 부유하는 안개의 도시에 갇혀 생존의 문제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산다는 것은 행복인가, 불행인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인간의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뿐, 멈추지도 않고 더구나 뒤를 돌아보는 건 어리석다고 여길 테니까 말이다.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먼지에 찌든 폐부 깊숙이 청량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신선한 전나무 향이 머리를 맑게 했다. 단단하게 다져진 흙길과 길 가에 쭉쭉 뻗은 키 큰 전나무들이 그렇게 정답게 느껴질 수가 없다. 나무를 보면, 나무에 가까이 있으면 위안을 받는다. 전나무 기둥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거친 나무 껍질이 생명력 있는 자연에서 느끼는 삶의 에너지를 준다. 이 나무들은 몇 살일까. 수령이 꽤 됨직한데 그 푸르름은 늙지 않는다. 나도 저 나무들처럼 늙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내소사의 백미는 대웅보전이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아담한 자태 속에 들어가보면 뜻밖의 선물을 만난다. 꽃살문의 화려한 문양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실루엣의 극치라고나 할까. 연꽃, 국화가 새겨진 문살이 어찌나 섬세한 지, 사진으로 본 인도 불교 조각품을 대하는 듯하다. 400년 전 이 나무에 하나하나 꽃을 조각한 장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행하는 싯타르타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불심으로 정진했을까. 기나긴 세월에, 바람결에 닳은 꽃살문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꽃살문을 어루만지며 오래 전 장인의 손길을 더듬어본다. 그 옛날에 나무에 꽃을 새기던 장인의 거칠고 투박한 손과 맞닿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모처럼만에 맑은 공기와 봄 햇살에 맘껏 몸을 맡겼다. 대웅보전 주춧돌에 걸터앉아 한참동안 봄볕의 나른함에 취했다. 시간이 멈춘 듯, 다만 아이들의 티없는 웃음소리가 현실의 나를 일깨웠다. "아, 따시다." 노구를 이끌고 법당을 둘러보던 한 노인이 햇살 아래로 나오며 말했다. 꽃말이 '영원불멸의 사랑'이라는 산수유꽃도 피었다. 붓다의 자비는 영원할까.

일주일 전 위장에 탈이 나서 며칠 앓아서인지 자리에서 일어날 때 현기증이 났다. 미세먼지, 한파가 번갈아 오는 바람에 지난 겨울 통 운동을 못했었다. 겨우내 1kg 찐 살이 아프면서 도로 빠져버렸다. 밥을 먹어야 어깨가 펴질 것 같았다. 내소사 일주문에서 나오자 음식냄새가 진동해 코를 벌름거렸다. 입으로야 파전에 막걸리 한잔 쭈욱 들이켜고 싶지만 산채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고사리, 버섯, 콩나물, 시금치 등 온갖 나물과 계란 프라이가 얹힌 대접에 밥 한 공기를 통째로 넣어 비볐다. 그리고 배추 된장국을 한 술 떠먹었다. 아! 구수한 된장냄새. 요번에 체하고 배탈난 날 저녁에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을 때 멸치·표고버섯가루와 대파만 넣은 맑은 된장국을 끓여 마셨다. 그리고 이틀동안 된장으로 끓인 시금치죽으로 속을 다스렸다.

된장으로 만든 음식은 다 좋다. 일단 속이 편하다. 김치찌개보다 된장찌개가 맛있고, 여름날 엄마가 해 주던 된장 수제비는 잊을 수 없다. 앞뜰에 심은 호박잎과 애호박을 손으로 뜯어넣고 청양고추 쫑쫑 썰어 넣은 된장 수제비는 엄마의 별미였다. 달착지근한 일본 미소된장보다 깊은 맛이 나는 우리 된장이 내 입맛에 맞는다. 비빔밥을 먹으면서 배추된장국을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된장국이 맛있다며 직접 담그냐고 물으니까 "네"하고 휑 가버렸다. 순간 머쓱했다. 혹시 식품회사에서 파는 된장에 마법의 조미료를 넣었나? 아니면 말린 바퀴벌레를 갈아서 넣었을 지도….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냉이된장국과 달래무침을 해 먹었다. 봄의 향기였다. 지금 산과 들에 쑥이 돋아났을텐데 쑥된장국도 빠질 수 없다. 언제 아팠냐는 듯 다시 식욕이 동한다.<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3.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