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2019-03-27
그 곳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렀다. 냇가엔 아름드리 미루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졌고 주변의 땅은 기름졌다. 모내기 철이 되면 밤새도록 냇물을 퍼 올리는 물레방아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미루나무 잎이 햇볕에 반짝일 때면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벤..
2019-03-21
여자는 수다스럽고 남자는 과묵하다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이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 그렇다는 거다. 쇠털처럼 가벼운 남자들의 입. 아니, 가볍다기보다는 떠벌리는 습성이라고 해야겠다. 여자들과의 성관계 말이다. 남녀간의 성관계는 지극히 사..
2019-03-07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무언가 안되고 있다/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삶의 한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극지의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이며 가는 흰 북극곰처럼 아름답다. 왜 그랬을까.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2019-02-28
나는 이완용입니다. 이완용이란 말만 들어도 우리 동포들은 분노에 치를 떠는 바로 그 매국노란 말이오. 내일은 3.1절, 임정 100주년이 되는군요. 벌써 그렇게 됐구려. 내가 감히 감회가 새롭다고 말씀드리면 나에게 침을 뱉고 싶을 겁니다. 다만 인간 세상은 그리 단순하..
2019-02-13
친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할 때 종종 이 얘기를 언급했다. 지금은 흔한 게 고기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그러질 못했다. 동네서 좀 산다 하는 집이면 몰라도 대개는 일년에 고기 먹는 날이 손꼽을 정도였다. 친구네도 명절이나 돼야 고기 맛을 볼 정도였다고 한다. 친구..
2019-02-06
"나는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입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대학 시절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의 외할아버지다. 아베는 정계에 발을 들인 후에도 각종 인터뷰나 저서에서 기시에 대해 언급했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영향을 받았다는..
2019-01-23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는 생산물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복제의 시대"라고 지적했다. 바야흐로 이미지로 먹고 사는 시대다. 본질은 뒤에 숨고 기호로 범벅된 이미지가 타인에게 어필한다. 수백만원짜리 명품백과 억대를 호..
2019-01-16
'sky'는 우리말로 '하늘'이다.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고백했다.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식민지 조국 앞에서 괴로워했다. 'SKY'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영문 이니셜로 한국 최고 명문대학의..
2019-01-02
그날도 하늘이 뿌옜다. 황사마스크를 끼고 태안화력발전소 앞에 섰다. 바닷가 멋진 풍광을 뒤로 하고 자리잡은 태안화력의 위용이 날 압도했다. 높게 치솟은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문에선 경비원이 들어가는 차를 일일이 체크했다. 다가가서 안에 들어갈..
2018-12-26
저는 여행갈 때는 으레 배낭에 책을 넣어 갑니다. 여행 전날 짐을 꾸릴 때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양말, 티셔츠, 속옷, 치약, 칫솔, 스킨로션, 수첩… 그리고 책 한 권. 거실과 방을 왔다갔다 하며 분주히 이것저것 배낭에 넣을 땐 마치 어릴 적 소풍가는 것..
2018-12-12
이 동네로 이사온 건 13년 전이었다. 예전에는 제법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해 가는 시장이 과거의 흔적을 간신히 유지하는 곳이었다. 그 시장을 울타리 삼아 안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나도 이 동네 주민이 됐다. 회사도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고 무엇보다 재래시장..
2018-12-05
'국가부도의 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팝콘 씹어먹는 소리도, 음료수 홀짝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들리는 건 한숨과 탄식 뿐. 관객들은 2시간 동안 숨 죽이고 스크린에 집중했다. 조조영화인데도 객석이 거의 찼다.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20대 청년들도 많이..
2018-11-21
고3때 한 번의 실수(?)로 졸업할 때까지 마음고생을 했다. 어느 날 학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일종의 소원수리를 받았다.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을 써내라는 거였다. 특정한 교사에 대한 얘기가 나돈 모양이었다. 쓴 사람 이름은 비공개라고 했다. 당시 무용 교사는 인격적으로..
2018-11-14
"야…야…야… 에이 씨발." 친구는 거리를 걸으면서 종종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서른을 맞은 해에 어느날 친구와 난 광주비엔날레를 보러 광주에 갔다. 전시회를 보고 광주 시내를 걸으며 친구는 담배를 입에 물고 앞에 가는 사람에게 하듯 또 욕을 했다. 난..
2018-10-31
설렘을 안고 아파트에 입주한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쓸고 닦고 이삿짐을 들여오고, 온 가족이 출동해 막내 동생의 내집 마련을 축하해줬다. 짐들을 정리하고 거실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으며 '이제 나도 아파트 주민이 되는구나' 실감했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
2018-10-24
구스타프 쿠르베의 그림을 최초로 기억하는 건 고등학교 미술책에서다. '돌을 깨는 사람들'은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나 인상주의 화풍과는 많이 달랐다. 하층민의 노동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은 르누아르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처럼 달달하지 않았다. 훗날 쿠르베의 '세..
2018-10-10
"나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 웃음이 쿡 나왔다. 세계 제 1의 강대국 대통령이 사랑 타령이라니. 갑자기 낭만적 노스탤지어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트럼프는 "나는 (김정은에게) 무척 거칠었고, 그도 그랬다. 우리는 그렇게 (언쟁을) 주고받았다"며 "그런 뒤 우리는..
2018-10-03
초등학교 때 별명이 '두꺼비'란 선생님이 있었다. 곱슬머리에다 얼굴이 시커멓고 피부가 우툴두툴해서 붙여졌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선생님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선생님은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은 터라 없는데서 '두꺼비, 두꺼비' 하며 놀리기를 주저하지 않..
2018-09-19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깊은 밤, 고개를 넘으니 집채 만한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번쩍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한다. "떡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자식 먹일 떡이지만 살아야 하기에 떡 하나를 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포에 떨며 또하나의 고개를 넘자마..
2018-09-12
당신은 치욕적이라고 했습니다. 분노를 넘어 비애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신은 지난 6일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작정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자기 성찰과 기도로 보냈다고요? 그런데 변명과 회피로 마무리 하더군요. "가..
2018-08-24
아틸라는 서구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훈족의 아틸라'는 일테면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라는 의미였다. 5세기 유럽은 동쪽에서 쳐들어온 훈족의 아틸라에게 철저히 짓밟혀 쑥대밭이 돼 버렸던 것이다. 피해자인 유럽의 시각에서 저술된 역사에서 아틸라는 잔혹한 파괴자였다. 어찌..
2018-06-08
88올림픽의 축제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한국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한 마디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맛봤다. 지강헌을 비롯한 탈주범 12명은 10월 8일 대낮 서울 한복판 민가에 들어가 경찰과 대치전을 벌였다. 이유는 과도한 형량과 보호감호 처분에 불만을..
2018-04-20
1895년 5월, 오스카 와일드는 재판정에서 2년간 강제 노동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는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자였다. 아일랜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와일드는 당대의 댄디 보이였다. 문학적 재능과 타고난 패션 감각으로 그는 유행을 선도하는 예술가였다. 늘 옷을 잘..
2018-03-09
"권력은 본질적으로 짓밟는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다. 권력은 절대 나눠 갖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 아래 태양은 하나이지 않은가. 권력투쟁의 선봉에서 권력의 단맛, 쓴맛을 맛본 마오쩌둥도 말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평등한 권력은 없다..
2018-01-26
지난해 늦가을, 볕 좋은 휴일에 대청호변을 하루종일 걸었다. 그런데 중간에 복병을 만났다. 호숫가 어느 마을에 들어갔다가 두시간 넘게 발목을 잡혔다(?) 간신히 빠져 나왔다. 절집 같기도 무당집 같기도 한 조그마한 집이 햇살 좋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길래 불쑥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