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무엇일까. 왜 글을 써야 하는가.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길을 나선 자의 행로는 쓸쓸하다. 어둠을 헤치며 나아갈지라도 피투성이 무릎은 감내해야 한다. 문득 칠흑같은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서쪽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반짝인다. 홀로 반짝이는 별은 내 인생의 좌표가 될 것인가.
하나의 작품은 온전히 작가의 생명이다. 작품과 작가는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폐부 깊숙이 고통이 전해진다. 그의 글쓰기는 고해성사나 다름없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것. 프로이트는 누누이 말했다. "어릴 적 고통스런 경험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어느 순간 불쑥 되돌아 온다"고. 12살 때 아버지가 광기에 사로잡혀 엄마를 죽이려 했다는 걸 믿을 수 있겠나. 한 손엔 낫을 들고 발버둥치는 엄마를 질질 끌며 부엌으로 가던 기억을 말이다. 숨이 멎을 듯한 끔찍한 경험은 작가에게 부끄러움이 되었다. 부모의 궁핍한 생활, 직업,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도 부끄러움이었다. 허나 드러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글로 써야 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작가는 자신의 고통스런 순간을 하나하나 끄집어 냈다. 아니 에르노는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책을 항상 쓰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위험한 모험을 감행한 글쓰기는 작가의 구원과 맞닿는다.
작가는 무당과 다름없다. 신과 인간의 영매자를 자처한다. 거기엔 고통스런 제의가 따른다. 산고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으며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어머니의 자살에 긍지를 느끼며 글로 써보리라 다짐하는 페터 한트케를 당신은 이해 가능한가. 오래 전 나의 데스크칼럼을 본 후배는 나무라는 듯한 말을 건넸다. "선배 그런 거 왜 썼어요." 무슨 말인지 안다. 내밀한 가족사는 감춰야 한다는 것을. 사회적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은 무시할 수 없는 법. 하지만 난 깨달았다. 상처와 열등의식은 곪은 종기 터트리듯 까발려져야 한다. 칼로 째서 고름을 짜내야 비로소 상처는 아문다. 아,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글쓰는 재능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박하고 솔직한 글에 더 감동받을 때가 있다. 지난해 부여 송정마을 주민들은 '내 인생의 그림책'을 펴내 화제를 모았다. 7,80대 어르신 23명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특별한 그림책이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오던 어른들이 경로당에 모여 비지땀을 흘린 노고가 돋보인다. 이 분들은 오로지 자신에 집중해 살아온 삶을 솔직하게 썼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하지 않아 더 울림을 준다. 시 한편을 소개한다. '안씨럽기는 안씨럽지/그래도 내가 키운 곡식을 찍어 먹을 때/가만 있을 수는 없지/알라, 그건 안되지/허망하고 미웁고 다 죽였으믄 좋겠지'. 곡식을 쪼아먹는 참새에 대한 시다. 순수하고 해학적이어서 미소가 절로 번진다. "자신에 대해서 실제의 자신보다 더 참되게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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