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뿐만이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인간임에도 동물로 취급받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흑인을 오랑우탄과 같은 종으로 분류하거나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이 여인의 원래 이름은 바아르트만이라는 흑인 노예였다. 그녀는 엄청나게 튀어나온 엉덩이와 돌출한 성기를 갖고 있었다. 19세기 초 유럽인들은 이 '이상한' 흑인 여인을 시장판에 전시하며 자신들의 눈요깃거리로 삼았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말이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만물의 영장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진화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이 친족 관계였다는 것이다. 원숭이, 아니 쥐와 인간이 한 뱃속에서 나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냉철한 프로이트는 이들을 비웃으며 일침을 가했다. "자신들이 신의 자손이라 주장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세계 사이의 공동체적 유대를 없애버렸다." 거만한 인간들은 도리질을 하며 동물 착취를 멈추지 않았다.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은 인간이 도축과정의 동물을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는가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그런데 100여년 전에 나온 이 소설 속의 상황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또렷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갈고리에 꿰여 허공에 매달리고, 피를 뽑히고, 잘리고…. 이렇게 가축은 인간의 먹잇감으로 태어나 끔찍하게 생을 마감한다. 야생의 동물도 나을 게 없다. 운 나쁜 동물은 평생 우리에 갇혀 사는 신세로 살아간다.
칼 세이건은 "벌거벗고 왜소하고 상처받기 쉬운 한 영장류가 어떻게 자기 이외의 모든 종을 굴복시켰을까"라며 한탄했다. 많은 동물은 창살 안 시멘트 바닥에서 야성을 잃고 살아간다. 인간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길들여진 동물이 된 것이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로키산맥에서 거칠 것 없는 야생의 사자와 퓨마가 어쩌다 인간의 덫에 걸리는 신세가 됐을까. 대전동물원의 뽀롱이처럼 그마저도 인간의 실수로 죽는 동물도 있다. 야성이 남아있는 맹수들은 동물원의 관리 부실을 틈타 울타리를 넘어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로는 사살되거나 다시 붙잡힌다. 그도 아니면 정신 분열증 같은 이상 행동을 보이며 목숨을 연명한다.
동물원은 분명 부자연스런 환경이다. 인간에겐 즐거움을 주지만 동물은 갇혀 있는 공간이다. 인간은 그들에게 많은 죄를 짓는 셈이다. 같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 지구가 갑과 을로 나누어졌다. 사실 동물의 고기처럼 맛있는 게 없다. 탐욕스럽게 먹고 난 후의 죄책감. 인간의 딜레마다. 단양 아쿠아리움의 수달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남한강에서 맘껏 헤엄치며 물고기를 잡아먹어야 할 수달의 갇힌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수달의 공허한 눈빛이 지금도 선연하다. 과연 인간에게 동물의 자유를 빼앗을 권리가 있을까. 창살 너머 뽀롱이들이 행복해 보이는가.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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