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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 통인시장 (사진=김영복 연구가) |
조선시대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해 수성동으로 불린 계곡은 경치가 뛰어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사랑하던 장소였습니다. 겸재 정선은『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돌다리인 기린교가 있는 수성동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1941년 5월에서 9월까지 약 다섯 달간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며 '십자가', '태초의 아침', '못 자는 밤' 등 10편의 시를 썼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상은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양되어 스물세 살이 되던 해까지 20여 년간 이곳 서촌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오랫동안 골목을 지켜온 낡은 상점들과 한옥 집, 그리고 새로 생겨난 가게들의 조화로 특유의 정겨움과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징장 이용구(李龍九, 1937~2024)선생의 막내 아들 이경동 씨의 부인 김순영 씨가 운영하는 카페 '놋그릇 가지런히'를 방문했다가 점심도 먹을 겸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통인시장(通仁市場)은 일제 강점기인 1941년 효자동 인근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을 모태로 한국전쟁 이후 서촌(西村) 지역에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옛 공설시장 주변으로 노점과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고 한다.
시장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오밀조밀하게 맛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하나의 골목이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전형적인 전통 시장으로 약 70~80개의 점포가 형성돼 있다. 식당과 반찬 가게 등 요식 관련 점포가 가장 많은데, 최근에는 도시락 카페를 운영하면서 관광형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특히 이 시장은 라면땅과 기름떡볶이 등 다양한 길거리 음식이 많아 주변의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재미있는 것은 통인시장 입구에서 파는 엽전을 구입한 뒤 도시락 카페 가맹점에 지불하면 시장 내 음식을 뷔페처럼 자유롭게 이용하며 도시락에 담아 먹을 수 있다.
오후 4시까지 엽전 교환이 가능하고 1만 원 어치 엽전을 9000원에 구매할 수가 있다.
기름떡볶이. 순대 꼬치, 김치전 타코야키, 열무김치, 튀김만두, 닭꼬치 등 다양한 길거리 음식들이 시장통 양옆에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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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인왕식당 (사진=김영복 연구가) |
이 집은 얼마 전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함께 와 국밥과 소주를 먹고 간 집인 것 같다.
가게 입구에서부터 가게 안에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붙여 두고 좁은 가게 한편에 대통령이 앉은 자리라고 사진과 함께 글이 적혀 있다.
어쨌든 이 집은 소머리국밥집으로 유명한 것 같다. 필자가 갔을 때도 손님들이 많았다.
소머리국밥에 대해서는 문헌 자료가 많지 않다.
다만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있던 남저(南樗) 이우식(李祐植, 1891~1966)선생의 ' 牛頭羹飯一器(우두갱반일기) 소머리 국밥 한 그릇'이 떠오른다.
"何來何處去(하래하처거)어디에서 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食汝我忘飢(식여아망기)너를 먹으며 나는 배고픔을 잊네 / 落淚黃牛吼(낙루황우후)눈물 떨구며 누렁소가 음매 우니 / 傾杯獨自悲(경배독자비)술잔 기울이며 혼자 절로 슬프다."
소머리국밥을 먹으며 누렁소 생각을 하는 남저(南樗) 선생의 심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다.
1926년 8월 「동아일보(東亞日報)」'평양인상'이라는 기사를 보면 '전 설렁탕 특유의 냄새를 '복숭아 향과 육수 냄새가 섞인 듯하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 냄새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머리뼈를 넣어 고면 그런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소머리국밥에서 그런 냄새가 나질 않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리 검색의 생활화라지만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고, 여하튼 소 한 마리를 다 넣고 끓여야 그런 냄새가 나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설렁탕에도 소머리가 들어간 모양이다.
소의 양지머리뼈를 '양골(陽骨)'이라고 하는데, '양골국'은 고급 해장국에 속했다고 한다. 요즘 '소머리 해장국'의 원조 격인 서울의 양골국에 대해 박종화(朴種和, 1901~1981)시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양골국은 양지머리로만 끓인 장국밥이나 설렁탕보다 재료가 싸니 값도 싸다. 大衆들이 새벽에 모여들어 약주 한 잔에 양골국을 먹고 간다. 술국 중에 級이 약간 높은 음식이다. 양골국은 양지머리의 살을 긁어내어 뼈만 남은 등성이를 도끼로 찍어서 정하게 물에 씻은 후에 밤새도록 고아 놓고 그 국물에 우거지 배추를 집어넣어서 백여도가 넘도록 삶아버린다. 우거지 배추로 양골기름이 배고 양골에 푸성귀 따위가 어울려서 기막힌 珍味가 되어 버린다. 동지 섣달 길고 긴 추운 밤을 지내다가 새벽 (중략) 양골 끓이는 술집으로 찾아가서 약주술 두서너 잔에 양골로 안주를 하고 밤 지낸 빈창자에 술국밥을 먹는 맛이란, 그 시점만은 천하의 행복을 독차지한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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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국밥 (사진=김영복 연구가) |
"의사들의 감정에 따르면 이 쇠머리 스프는 정말로 좋은 것으로, 닭고기 스프나 우유가 그에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큰 솥은 일 년 내내 걸쳐져 있으며 바닥까지 아주 깨끗이 씻는 일도 없다. 매일매일 뼈를 교체하고 물을 더 부어서 끓여낸다. 이 국물 즉 스프는 아주 잘 끓여 내린 것으로, 매일 연속해서 끓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이것을 정제하면 분명히 세계의 어느 것도 비견할 수 없는 자양품(滋養品)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지금 쇠머리 스프를 병에 담아 한국 특유의 수출품으로서 상용하게 될 것이다."
소머리국밥은 문헌자료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근대 음식인 것 같다.
메뉴에 서울에서는 흔히 접하기 쉽지 않은 '돼지국밥'이 있어 시켰다.
한 20여 년 전 인사동에 돼지국밥집이 있었으나 개업한 지 오래가지 않고 문을 닫은 적이 있다.
돼지국밥은 주로 대구 아랫녘인 경남과 부산지방에서 유명하다.
왜 경상도에 돼지국밥을 좋아하고 서울 사람들이 돼지국밥을 즐기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중국은 쇠고기보다 돼지고기를 더 즐긴다.
중국 청대(淸代)의 식육(食肉)은 거의 돼지고기 일색이다.
조선 숙종 때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55세 때 형 창집(昌集)이 동지 겸 사은정사로 갈 때 함께 따라갔다가 와서 쓴 『연행일기(燕行日記)』 제7권 숙종 39(1713 ) 2월 17일 중국 계주에 가 역관 박동화와 김만희·장원익·신지순·김상현·김응헌·유재창 등이 모두 와서 각각 둥근 의자를 가져다 둥그렇게 앉아 저육탕(猪肉湯) 및 삶은 저육[猪肉熟片] 등의 음식을 먹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철종 9년(1858년) 11월에 중국인 21명이 풍랑을 만나 표류, 충남 태안군 의항에 입항했다. 비변사 조사 내용이 남아 있다. 조선 관리들과 선원들의 문답 중에 돼지고기가 나온다. 이들은 강남성 송강부 상해현 사람들로 봉천에서 곡물을 실어 강남으로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배에는 황두(黃豆, 노란콩=대두), 소미(小米=좁쌀)와 더불어 저육 등이 있었으며 가격은 은으로 수천 냥에 달한다고 했다. 중국의 경우도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는 춘분(春分) 날 조정에서 빙실(氷室)의 얼음을 내기 전에 소사(小祀)로 북방의 신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사한제(司寒祭)를 올렸는데, 이때 희생물로 돼지 한 마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兄死聚嫂制)와 함께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3세기 들어 사라졌다.
초기에는 남자가 처가 옆에 마련한 서옥(사위집)에 들어갈 때 돈과 옷감 등을 예물을 처가에 주었다. 그러나 혼인풍습이 변하여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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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 한옥 골목 (사진=김영복 연구가) |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후 비가 오면 3일 안에 천신(天神)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지내는 제사가 보사제(報祀祭)다. 이 제사에는 숫 돼지를 올린다.
인조 15년(1637년) 8월 28일(음력)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이다. 지금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국왕 인조와 영접도감(迎接都監) 사이에 "중국 사신의 밥상에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로 대체한 일"로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내용이 있다.
"왜 (중국 사신 접대에 있어 전례에 어긋나게) 돼지고기(저육, 제육) 대신 쇠고기(우육)를 마련했는가?"라고 인조의 질문에 영접도감은 "청나라 사람들이 우육 먹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이번 칙사의 행차가 추운 계절을 당하였으므로 생선 따위의 물종을 구해 올 길이 없습니다. 매일 연향에 저육을 쓰는 곳이 매우 많아 부족할까 걱정돼 전날 반선에 우육을 마련했는데 저육 두 근이 너무 소략한 것 같아서 우육을 한 근 더 마련한 것입니다. (중략) 혹 저육을 먹자고 청하거든 저육으로 바꾸어 주겠습니다."
국왕 인조는 "이러한 때에 기르는 소를 허다하게 도살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고, 음식물을 더 주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한결같이 전일 천사(天使)의 예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라고 지시를 하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 1709~87)의 시문집 『강한집(江漢集)』에 경상도(慶尙道) 의령(宜寧) 사는 유생(儒生) 허엽(許曄)이 강한(江漢)을 찾아 왔을 때, 그의 효성을 극찬하면서 쓴 글에 '돼지고기 국'이 나온다.
특히 주(註)에 '삼죽'이 나오는데, 이 삼죽은 "삼이란 것은 소·양·돼지고기 세 가지를 균일한 분량으로 준비해 잘게 썰어서 쌀과 섞는데, 쌀 2에 고기 1의 비율로 배합하여 끓인 죽이다"라고 나온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제61권 영조 15년(1739) 1월 28일 '소는 황소[黃牛]를 쓰되 푸른색 천으로 덮고, 노주례(勞酒禮)에 있어 농우(農牛)를 죽여서는 안 되니 돼지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에도 영조 15년(1739) 1월 18일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은 "노주(勞酒) 때에는 마땅히 소를 잡아서 음식을 장만해야 하겠으나, 친경하여 농사를 권장할 때에 농우(農牛)를 죽일 수 없으니 돼지로 갈음하도록 하라"고 했다.
노주례(勞酒禮)란 임금이 적전에 나아가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 적전에 심은 곡식을 수확할 때 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친예(親刈),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등을 행한 뒤에 그 행사에 참여했던 관원과 백성에게 베풀던 잔치를 말한다.
친경 후 소를 잡아 국을 끓인 게 아니라 돼지를 잡아 국을 끓여 나눠 먹었던 것이다.
서촌에서 돼지고기 국을 한 그릇 다 비우고 소화도 시킬 겸 경복궁 앞 광화문을 지나 인사동까지 걸었다.
/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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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바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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