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시네레터] 복수를 통해 드러난 균열과 위태로움 - '경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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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생의 시네레터] 복수를 통해 드러난 균열과 위태로움 - '경주기행'

김대중 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 승인 2026-09-16 16:48
  • 신문게재 2026-09-17 18면
  • 최화진 기자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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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기행' 포스터.
딸이 죽은 지 8년이 지났습니다. 엄마 옥실은 이 억울한 죽음을 한시도 잊지 못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일본으로 못 가고 경주로 수학여행 갔다가 당한 비극을 보복하려 합니다. 첫 장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승합차가 덜덜거리고 가다가 테이프로 얼기설기 고정해 놓은 범퍼가 떨어집니다. 엄마와 세 딸이 작당한 보복 프로젝트는 참으로 허술합니다.

드디어 결행하는 보복 장면은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 죽음 장면과 많이 닮았습니다. "다 돼 갑니다." 하고 울면서 줄을 당기는 엄흥도와 나무에 달린 백상현을 줄로 당기는 옥실은 괴롭고 아프기가 거의 똑같습니다. 친아들을 살리려는 애초 의도에 악한 세조 무리의 손에 넘기지 않으려는 엄흥도의 줄 당기기는 엄숙한 의식입니다. 옥실의 경우 역시 복수로써 마침내 딸을 완전히 죽음의 세계로 놓아 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제의와 같습니다. 엄흥도와 엄마 모두 자연인이라기보다 의례를 수행하는 사제처럼 여겨집니다.

떠났지만 온전히 보내지 못한 한스러움이 이 영화의 핵심 동인입니다. 하필이면 경주로 보냈던가. 떠나는 아침 제대로 배웅도 못했다는 자책은 사랑을 다 하지 못한 엄마의 가슴을 한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이 작품은 가난한 자가 당하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괴물>(2006)과도 비슷합니다. 특히 할아버지의 대사 "새끼 잃은 부모 속이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리 밖까지 진동을 하는 법이여."는 <경주기행> 속 엄마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괴물>에서 보여준 보복 과정에서의 좌충우돌이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따지고 보면 살인마 백상현도 사회적으로 대단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약자가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고 폭행하는 것은 명백히 병리적입니다. 그러므로 엄마와 딸들이 힘을 모아 보복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더 약한 자의 희생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문제적입니다. 한밤중 온 식구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분명히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행위는 장례와 제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례는 산 자를 위한 성격이 더 강합니다. 기억하기와 떠나보내기 중 이 영화 속 제례는 떠나보내기에 가깝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딸이자 동생 경주를 위해 백상현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보복은 단지 폭행의 되갚음을 넘어 죽은 자를 온전히 떠나보내기 위한 의례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 산 자들이 망자를 대하는 것이 더 이상 현실적 과제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되도록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장면. 옥실은 사적 제재에 대한 처벌을 받기 위해 법정에 있습니다. 문득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시점으로 과거 회상의 환상 장면이 펼쳐집니다. 수학여행 날 아침 왜 늦게 깨웠는가 하는 경주의 푸념에 옥실이 밖에까지 나가 딸을 배웅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 한들 달라질 게 있는가. 배웅하지 않음과 배웅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작은 사랑의 표현 유무가 한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삶이고 사랑임을 깨우칩니다. 옥실과 경주는 평범 속에 깃든 소박한 사랑의 기회를 강탈당한 것입니다. 이 가족의 위태로움은 그 기회의 기반이 붕괴된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아빠이자 남편조차 잃고 지낸 8년 후 거사를 치르기 위해 모인 모녀 가족에게서 우리는 위태로움과 균열을 봅니다.

이정은의 연기가 이를 데 없이 빼어납니다. 분노와 증오, 흔들림과 두려움, 세 딸들과의 갈등 속에서도 마침내 복수 프로젝트를 수행해 내는 집념을 균형 있고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김대중 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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