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추석 보름달 아래 사라진 반곡리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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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추석 보름달 아래 사라진 반곡리를 그리며

김정환 전 세종경찰서장, 반곡역사문화보존회 부회장

  • 승인 2026-09-09 12:59
  • 이희택 기자이희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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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동 괴화산에서 내려다본 금남면 일대. (사진=중도일보 DB)
여름 내내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다가, 추석날 아침 새 양말을 신고 고무신을 신을 때의 그 감촉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미끄러우면서도 서걱거리던 그 느낌이 좋아서 추석날 아침에만 신고는 두고두고 아껴 신었다. 그것이 내 유년의 추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주경야독하던 시절, 고단한 타향살이를 견디게 한 힘은 명절이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다림이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조치원역에 내려, 시외버스로 옛 금남면 대평리에 도착하면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그때부터 논길을 걷고 도랑을 건너 고개를 넘어야 했다. 저만치 괴화산 자락이 보이면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아, 이제 다 왔구나"하며 그렇게 나는 그리운 고향 '(금남면) 반곡리'에 닿곤 했다.

추석 전날이면 온 마을에 돼지 울음소리가 담을 넘었고, 부엌에서는 부침개 부치는 냄새가 마당을 지나 이웃집 울타리까지 퍼졌다.

할머니는 맷돌에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드셨고, 나의 작은 손도 자루를 함께 눌러 짜며 한몫을 보탰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 모두 5형제셨기에, 추석날이면 아침부터 점심까지 큰집과 작은집을 돌며 차례를 지냈다.

그래서 골목마다 형제요, 대문마다 종친인 마을이었다.

차례가 끝나면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음식을 장만하신 어머니는 지친 몸으로 낮잠을 청하셨다. "나는 명절 오후에 실컷 자는 게 좋아"란 그 말씀의 뜻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의 시간이 다시 시작됐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때 함께 놀던 얼굴들과 흙먼지 날리던 골목길은 지금도 또렷하다.

아버지를 따라 선산에 성묘를 갈 때면 아버지는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여기가 내 자리다"란 전언이 어린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지만, 나는 언젠가 이 고향을 지키며 살다가 아버지 곁에 가게 될 것이란 현실 인식을 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마을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2012년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함께 반곡리는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김정환
김정환 전 세종경찰서장
4백여 년을 여양 진씨, 경주 김씨, 의성 김씨가 온기를 나누며 살아온 세거지가 도면 위 한 줄로 정리되던 그 무렵, 형제 같던 이웃들은 저마다 흩어졌다. 아버지가 평생을 누우실 터라 당부하셨던 조상의 산소마저 면례해야 했다. 집도, 논도, 골목길도 사라졌다.

하지만 마을이 사라졌다고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옛사람들은 이를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다행히 반곡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금강수변공원의 반곡정과 반곡리 유적비, 화곡정과 태양십이경 시비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실향민들의 발걸음을 맞고 있다.

이번 추석에도 나는 괴화산과 반곡리의 흔적을 더듬어 '반곡팔경(盤谷八景)'을 걸어보려 한다. 이 반짝이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양말 한 켤레를 아껴 신던 소년이 있었고, 부엌에서 부침개를 부치며 가족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있었다.

건물보다 먼저 사람이 있었고, 도로보다 먼저 길이 있었으며, 도시보다 먼저 삶이 있었다.

고향을 잃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 번쯤 반곡정에 올라 금강의 바람을 맞아보시라고. 그 바람 속에서 이웃들의 목소리와 어머니의 손맛이 문득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명절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날이다. 새로 세종에 터를 잡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 도시를 자신의 고향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서로의 추억을 품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면, 낯선 도시도 어느새 따뜻한 고향이 된다.

반곡동의 보름달은 어린 시절 반곡리에서 바라보던 바로 그 달이다. 마을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떠났지만, 달빛 아래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달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고향을 불러본다. "반곡리야, 잘 있느냐."

이번 추석, 반곡동의 보름달이 사라진 고향과 오늘의 세종을 함께 비추며 누군가의 마음속에 따뜻한 고향의 미소를 밝혀주기를 바란다.
김정환 반곡역사문화보존회 부회장(전 세종경찰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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