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한 표를 빼앗긴 사람은 전부를 빼앗긴 것이다

  • 오피니언
  • 오늘과내일

[오늘과내일] 한 표를 빼앗긴 사람은 전부를 빼앗긴 것이다

신동철 법무법인 유앤아이 변호사

  • 승인 2026-06-21 16:28
  • 신문게재 2026-06-22 19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신동철
신동철 변호사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공익광고를 접한다. "국민의 소중한 권리, 한 표를 꼭 행사해 주세요." 그런데, 정작 "죄송하지만, 투표용지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 이것은 맛집 추천을 받아 찾아간 식당에서 "재료가 떨어졌으니 다른 데 가서 드시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식당이야 다음에 다시 가면 되지만, 그날 그 시간의 한 표는 옆집에서도, 다음 날에도 다시 행사할 수 없다. 그런데 2026년 6월 3일,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날 서울 송파의 한 투표소 앞에서는 마감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손에는 투표용지 대신 대기번호표가 들려 있었다. 같은 시각 전국 26개 투표소에서 투표가 멈췄고, 부족했던 용지는 수십 개 투표소에서 7천여 장에 이른다고 한다.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선거용지 부족 사태'였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의 실수나 시민의 불편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끝내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하고 투표를 포기한 사람이 적어도 수십 명에 이른다는 집계가 나왔다. 누군가는 "그 정도 숫자쯤이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참정권은 나누고 양보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서, 한 사람이 한 표를 빼앗기면 그에게는 권리의 전부를 빼앗긴 것이다. 그것은 당황스러움이나 번거로움을 넘어, 헌법이 보장한 권리에 대한 치명적인 침해다. 그렇게 한 표를 행사하라 독려해 놓고, 막상 권리를 행사하러 온 시민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 뿌리에는 각급 선거관리위원회가 비상임 위원장 체제로 운영되는 구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위원장은 위원들의 호선으로 뽑게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법관이 뽑힌다. 정치로부터 멀고 신분이 독립되어 있어 공정한 직무 수행을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법관에게는 재판이라는 본업이 있다. 후보 등록부터 투표용지 관리까지 방대한 실무는 사무국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처리하고, 위원장은 올라온 서류에 도장을 찍는 역할에 머물기 쉽다. 법관이 실질적으로 심사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요식행위로서 일하기 쉬운 구조로,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바지사장'을 세운 꼴이다. 더 이상한 것은 책임의 구조다. 실질적 권한은 행사하지 못했는데, 사고가 터지면 그 이름이 가장 먼저 불려 나온다. 게다가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을 조사하고 고발까지 한다. 그 위원장이 법관인데, 선관위가 고발한 사건을 다시 법원이 판단하는 그림도 개운하지 않다.

그간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담아 옮긴 일, 고위 간부 자녀 채용 특혜 의혹 등 잡음이 있었지만, 그조차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통로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2025년 2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므로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 결과 사태가 터지거나 내부 고발이 없는 한 선관위는 '아무 문제 없는 조직'으로 남는다. 더구나 법관이 선거관리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탓에 선관위가 일탈해도 법원이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자리 잡았다.

그러면 법관이 아니면 누가 맡아야 하는가. 이는 정말 풀기 힘든 난제다. 위원장을 선거로 뽑는 방안은 가장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그 선출 과정 자체가 정치적으로 오염될 위험을 안고 있다. 미국이나 독일처럼 행정부가 선거를 관리하는 나라도 있지만,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거치며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선거관리'를 갈망했던 우리 역사가 지금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 정신을 지키면서 책임성까지 함께 세우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렵다.

그러나 답이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단번에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소중한 한 표를 꼭 행사하라고 광고하는 만큼, 그 한 표를 끝까지 책임지는 일도 국가의 의무이고, 이는 결국 시민의 관심과 지혜에서 비롯된다. 민주주의를 다시 단단히 세우는 일은 결국 거기서 시작된다.

/신동철 법무법인 유앤아이 변호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교육행정 몰리고 시설직은 주춤…교육청 공채 경쟁률 '온도차'
  2. 나라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3. 하지(夏至)맞은 주말농장 ‘구슬땀’
  4. 6·3 지방선거 기간 대전·세종 장애인 투표 과정서 혼선
  5. 판사 낭독 착오로 ‘징역 8년→8개월’… 144억 전세사기범 항소심서 다시 징역 8년
  1. aT-한국수출입은행, K-푸드 수출 확대 공조
  2. 1조2천억 필수의료 특별회계 곧 시행…"우선순위 논의 시민협의체 필요"
  3. 생활고 이유 대전서 초등생 딸 살해하려 한 부부… 검찰 징역 12년 구형
  4. 대전시 ‘시장임기 일치조례’ 첫 적용 임박 논란 증폭
  5. 4년 만에 권력교체 된 충남도의회… 민주당 중심 원구성 윤곽

헤드라인 뉴스


대전시 ‘시장임기 일치조례’ 첫 적용 임박 논란 증폭

대전시 ‘시장임기 일치조례’ 첫 적용 임박 논란 증폭

민선 9기 출범과 함께 대전시 산하 출자·출연기관장들이 대거 교체되는 가운데, 시장과 기관장 임기를 맞춘 현행 조례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시장 교체기 마다 불거졌던 전 현직 인사 갈등 해소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지만, 시장 임기에 맞춰 기관장이 교체되는 구조가 부작용을 더욱 키울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시정 발전을 위해 전문성이 최우선 돼야 하다는 자리지만 이른바 '선거 공신'들의 낙하산 인사 자리로 활용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21일 대전시에 따르면 관련 조례 적용으로 민선 8기 이장우 시장과 임기를 함께..

6·3 지방선거 기간 대전·세종 장애인 투표 과정서 혼선
6·3 지방선거 기간 대전·세종 장애인 투표 과정서 혼선

지난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 기간 대전·세종 지역 장애인 투표 과정에서도 선관위 준비·대응 미숙으로 혼선이 있던 것으로 조사됐다. 2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예지 의원실(국민의힘)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전달받은 지난 지선 기간 시각장애인 민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 중 6개 지역에서 투표 관련 민원이 접수됐다. 이 가운데 대전의 한 투표소에선 투표보조용구 점자 오탈자로 시각 장애인이 불편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에선 투표보조 제도 안내 당시 직원이 시각장애 선거인이 아닌 동행인에게 안..

2027년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 부결에 소상공인 `탄식`... "처지 외면한 처사" 비판
2027년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 부결에 소상공인 '탄식'... "처지 외면한 처사" 비판

2027년 최저임금을 업종별 차등 적용안이 최저임금위원회 표결 끝에 무산되면서 소상공인들의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어려운 경기 상황에 직격탄을 맞은 숙박·음식업 등은 다른 업종보다 최저임금을 다르게 적용해야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상공인들의 처지를 외면한 처사라고 비판하고 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최저임금위원회는 최근 정부세종청사에서 제7차 전원회의를 열어 내년 최저임금을 업종별로 달리 적용할지를 놓고 표결했지만, 반대 14표, 찬성 11표, 무효 1표로 출석위원 과반에 미치지 못해 부결됐다. 노사는 최저임..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하지(夏至)맞은 주말농장 ‘구슬땀’ 하지(夏至)맞은 주말농장 ‘구슬땀’

  • 나라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라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 여름철 풍수해 대비 장비 점검 여름철 풍수해 대비 장비 점검

  • 수족구 예방…‘꼼꼼하게 손 씻어요’ 수족구 예방…‘꼼꼼하게 손 씻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