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애빌린 역설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애빌린 역설

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 승인 2026-05-05 13:52
  • 신문게재 2026-05-06 18면
  • 정바름 기자정바름 기자
clip20260504130840
원구환 부총장
사람들이 모여 결정을 내릴 때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속으로는 모두가 의문을 품고 있으면서도 마치 모두가 동의한 것처럼 일이 추진되는 경우가 있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사건은 대표적이다. 진시황이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는 신하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복종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유명한 사건을 벌인다. 황제 호해(胡亥) 앞에 사슴을 끌고 와서 "이것은 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황제는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일부 신하는 사슴이라고 말했지만, 많은 신하들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말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조고는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을 숙청했고, 권력 내부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점점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권력 내부에서 진실한 의견이 사라졌고, 잘못된 정치 판단이 이어지면서 진나라는 빠르게 붕괴의 길로 들어갔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적 생활에서도 존재하는데, 미국의 도시 애빌린(Abilene)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더운 여름날 한 가족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애빌린에 가서 식사하자"고 제안한다. 사실은 모두가 더운 날씨에 먼 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원할 것이라고 생각해 동의한다. 결국, 힘든 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서로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놀랍게도 그 여행을 진짜로 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을 조직행동학자 하비(Jerry B. Harvey)는 애빌린 역설로 명명했다.

애빌린 역설은 기업 조직뿐 아니라 정치, 행정, 학교, 심지어 가족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예컨대 어떤 조직에서 비효율적인 정책이나 프로젝트가 추진될 때 내부 구성원들은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은 찬성할 것"이라는 추측, 혹은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조직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라는 걱정 때문이다. 그 결과 실제로는 다수가 의문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은 마치 만장일치로 동의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사고와 유사하지만, 애빌린 역설의 핵심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동의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첫째는 갈등을 피하려는 인간의 심리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직 안에서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다수의 의견에 맞추려 한다. 둘째는 다수 의견에 대한 착각이다. 모두가 침묵하면 그 침묵이 곧 동의로 해석되기 쉽다. 셋째는 권력 중심의 위계적 구조다. 권한이 한쪽에 집중될수록 반대 의견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이 문제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 조직 문화적 차원에서의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정치적 관점에서는 정책 결정 과정의 토론과 검증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정치적 공론화 과정, 정책 검증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충분히 제기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국가 정책일수록 공개 토론과 전문가 검증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 당나라 태종은 신하 위징의 거침없는 간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정을 바로잡는 거울로 여겼다. 후대 역사에서는 이를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평가한다.

둘째, 사회적 관점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공론 문화가 중요하다.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고 해서 곧바로 적대적 진영으로 낙인찍는 분위기에서는 건강한 토론이 어렵다. 시민사회와 언론이 다양한 관점을 균형 있게 제시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셋째, 조직 문화적 관점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역할을 제도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회의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일부러 반대 역할을 맡은 사람이 정책의 위험과 약점을 점검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구성원들도 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집단적 착각을 줄일 수 있다.

결국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힘은 거창한 제도보다 더 단순한 데서 시작된다. 사슴을 보며 사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말을 기꺼이 들을 수 있는 문화다.

/원구환 한남대 학사부총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선도지구 발표 임박…몇 개 구역 선정될까?
  2. "서산 왕산 감태 빵 없어서 못 판다", 서산 어촌마을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라
  3. 세종 파크골프 전문가 키운다… 제2기 아카데미 활짝
  4. [한화에어로 참사] 참사 중간 수사 결과 발표, 사고 한 달 지났지만 정확한 원인 규명 '아직'
  5. [한화에어로 참사] 금속분말-세척수 반응했나… '수소가스 폭발' 가능성도 조사 쟁점
  1. '새벽 스쿨존 30㎞' 손보나… 황운하, 보호구역 탄력 운영법 발의
  2. 대전 밀알복지관,'안전한 보금자리'사업 수행
  3. '외연 확장' KAIST 이광형 총장 이임…실패연구소 이끌며 도전과 개척 강조
  4. 제5대 세종시의회 상임위 구성 마무리… 4개 위원장 모두 민주에
  5. [白壽 김희수와 건양의 사람들] 당신에게 건양은 어떤 이름 입니까…

헤드라인 뉴스


한화에어로 참사 중간수사 결과 "세척기 발화 가능성 커"

한화에어로 참사 중간수사 결과 "세척기 발화 가능성 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사업장 폭발 참사 발생 한 달 만에 경찰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규명하지 못했다. 사고 지점이 세척기 주변일 가능성과 당시 작업자들이 세척 설비 내부 탱크를 청소하고 있었다는 정황은 확인됐지만, 폭발을 일으킨 직접 점화원과 작업 공정상 문제, 안전관리 책임 소재는 추가 감정과 보강 수사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2일 대전경찰청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사업장 폭발사고 중간 수사 브리핑을 열고 현재까지 현장 합동감식 3회, 압수물 5700여 점 분석, 관계자 32명 조사 등..

대전 선도지구 발표 임박…몇 개 구역 선정될까?
대전 선도지구 발표 임박…몇 개 구역 선정될까?

대전 노후계획도시정비 선도지구 발표가 임박하면서 최대 몇 개 구역이 선정될지 관심이 쏠린다. 둔산지구의 경우 최대 3개 구역까지 선정 가능하며, 송촌지구는 1개 구역만 신청해 사실상 선정이 확정된 상황이다. 현재 대전시는 국토교통부와 사전 협의를 마친 상태로, 2~3주 내 선도지구 선정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2일 시에 따르면 대전 노후계획도시정비 선도지구 공모에 둔산지구 9곳, 송촌(중리·법동)지구 1곳 등 총 10개 구역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신청구역은 특별정비예정구역 27곳 중 1구역(상록수·상아·초원·강변) 3899..

[MSI 2026] 대전 뜨겁게 달군 T1… 이제 우승 향해 달린다! 브래킷 스테이지 대진 확정
[MSI 2026] 대전 뜨겁게 달군 T1… 이제 우승 향해 달린다! 브래킷 스테이지 대진 확정

대전에서 열리고 있는 이스포츠 게임축제 2026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 2026)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 대표로 출전한 T1이 승승장구하며 본선 라운드 브래킷 스테이지에 진출했다. '페이커' 이상혁의 소속팀인 T1은 1일 진행된 MSI 플레이-인 스테이지 최종전에서 강팀 '리퀴드(TL.북미)'를 세트 스코어 3대 0으로 완파하며 단 1팀에 주어지는 브래킷 스테이지 진출권을 따냈다. 이로써 T1은 세계 최정상급 8개 팀과 함께 우승을 향한 본격적인 레이스를 시작하게 됐다. T1의 본선 과정은 그야말로 '압도적'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가족사랑 금요장터서 농산물 구입 가족사랑 금요장터서 농산물 구입

  • 이재명 대통령, 충청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 참석 이재명 대통령, 충청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 참석

  • ‘개문냉방 안돼요’ ‘개문냉방 안돼요’

  • ‘함께하는 가치, 소비자의 힘’ ‘함께하는 가치, 소비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