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0장-류조비의 명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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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0장-류조비의 명당 이야기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4-21 16:00
  • 수정 2026-05-26 11:31
  • 신문게재 2026-04-22 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고흥 류씨 부인은 남편과 사별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회덕으로 내려와 은진 송씨 가문을 대전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성장시킨 주체적인 인물입니다. 그녀는 호랑이 앞에서도 당당했던 기개와 명당을 확보하는 결단력을 통해 가문의 번창을 이끌었으며, 이는 당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류씨 부인의 삶은 단순한 설화를 넘어 한 여성의 강인한 의지와 지혜가 가문의 뿌리가 된 역사를 상징하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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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묘려(寬洞墓廬)의 모습. 이곳은 열녀로 열녀문을 하사받은 쌍청당(雙淸堂) 송유(1389~1446)의 어머니 류씨 부인이 문종 2년(1452) 82세로 돌아가시자 이곳에서 장례를 지내고 그 옆에다 만든 재실이다. 사진=한소민 소장
대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은진 송씨를 빼놓을 수 없지요. 오늘은 이 가문이 대전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인 고흥 류씨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류씨 부인은 아들 송유(쌍청당)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당시 조선 초기에는 재가가 허용되었기에 친정에서는 젊은 딸의 앞날을 염려하며 새 출발을 권유했지요.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하며 시댁이 있는 회덕으로 향합니다.

개성에서 회덕까지의 여정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밤중에 네 살난 아들을 업고 나선 류씨부인 앞에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나타났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혼비백산했겠지만, 그녀는 오히려 호통을 치며 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기개에 감복한 호랑이는 밤마다 불빛을 밝혀 길을 안내하고, 냇가에 돌을 놓아 다리를 만들어 주는 등 가는 길 내내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전설같은 여정을 마친 류씨 부인은 마침내 회덕에 도착합니다. 이후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살았고, 아들 송유(1389~1446)를 가문을 일으키는 훌륭한 인물로 키워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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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동구 마산동 고흥류씨 묘역 사진=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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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동구 마산동 고흥류씨 묘역 사진=한소민 소장
이 여정에는 또 다른 여인의 사연도 전해집니다. 양천 허씨는 열일곱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유복자를 품은 채 류씨 부인과 함께 내려오다 연산에서 헤어졌다고 하지요. 이후 허씨 또한 아들을 정성껏 길러냈는데, 훗날 그 가문에서는 조선의 대학자인 김장생을 배출하였습니다.

회덕에 정착한 류씨 부인은 또 한 번 남다른 판단력을 보여줍니다. 시외조부인 황판서(황수)의 장지를 둘러싼 사건이 그것이지요. 남편 송극기의 외할아버지 황판서가 세상을 떠나자 당대 최고의 지관이 점지한 천하의 명당이 마련되었습니다. 류씨 부인은 그 자리가 가문의 미래를 좌우할 자리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물동이를 이고 산에 올라 묫자리로 파 놓은 구덩이에 물을 부었지요. 다음 날 장례를 치르러 온 사람들은 물이 고인 자리를 보고 불길한 징조로 여겨 결국 다른 곳에 묘를 쓰게 됩니다. 류씨부인은 버려진 그 명당을 얻어내 자신의 묫자리로 삼아 이후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도 서른 편 이상 수록된 '명당을 훔친 딸' 설화의 한 유형입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딸을 친정의 명당을 가로채 가는 부정적인 존재로 그리며 경계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요. 실제 회덕 황씨 문중에는 물을 부은 주인공을 류씨 부인이 아닌 시어머니 황씨 부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친정아버지의 장지를 훼손해 명당 자리를 얻고 그것을 며느리에게 주었다는 서사는 나쁜 딸 설화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지요.

이러한 이야기가 형성된 배경에는 17세기 이후 강화된 가부장적 질서가 있습니다. 딸은 출가외인으로 규정되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명당을 훔친 딸' 이야기는 이러한 장자 중심의 상속질서를 정당화하는 서사적 장치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류씨 부인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여 가문의 운명을 개척한 인물로 전하고 있습니다. 딸의 상속권을 박탈시키려 생겨난 명당 서사가 오히려 한 여성의 주체성과 기개를 드러내는 이야기로 전환된 셈이지요.

그녀는 남성 중심의 질서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재가를 마다하고 어린 아들을 업은 채 수백리 길을 걸어 와 회덕에 뿌리를 내렸으며, 호랑이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고, 가문을 위해 명당을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아들 송유를 훌륭한 인물로 키워냈지요. 이 모든 요소가 더해지며 류씨부인의 삶은 개인의 역사를 넘어 공동체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은진 송씨 후손들이 그녀를 류조비라 부르고 가문의 조상으로 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전하는 의미가 중요할 테지요.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임을 그녀의 삶이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신화가 된 류조비의 이야기를 그녀의 무덤 앞에서 다시 들으며 내내 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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