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아날로그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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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아날로그 봄맞이

최현숙 침신대 기획처장

  • 승인 2026-04-14 17:41
  • 신문게재 2026-04-15 18면
  • 정바름 기자정바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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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숙 처장
겨울의 끝자락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카로움이 있지만, 계절의 순환적 본질을 바꿀 수는 없는 듯하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질 때, 차가운 대지 아래서는 이미 거대한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클래식 음악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봄'과 관련된 음악은 단순히 계절을 표현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죽음 같이 캄캄하고 차가운 침묵을 깨고 나오는 새순의 힘찬 태동, 긴 침묵을 깨고 얼어붙은 강물을 깨로 들려오는 물소리와 같은 자연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노력한 예술가들이 오랜 고민과 노력 끝에 길어 올린 가장 찬란한 희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과거 시간의 예술가들이 노래한 클래식 음악으로 현재의 봄을 맞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봄의 음악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역시 안토니오 비발디가 아닐까?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선율이지만 그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부족하다. 1악장의 첫머리, 명쾌하고 단호한 합주가 울려 퍼지는 순간 나이와 문화와 상관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푸른 새싹의 활기찬 생명의 시작을 떠올린다. 비발디는 이 곡의 악보에 '새들이 즐거운 노래로 봄의 인사를 건네고, 시냇물은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속삭이며 흐른다'라는 짤막한 소네트를 덧붙였다고 한다. 비발디가 맞이한 18세기 베네치아의 화창한 봄 햇살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경이로운 음악이 바로 비발디의 '봄'이다.

18세기 초반의 비발디가 있었다면 후반부에 활동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봄'은 조금 더 인간적인 온기를 품고 우리의 마음을 봄의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흔히 베토벤하면 투쟁적인 진지함을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은 평온함과 유연함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의 어깨를 감싸듯 주고받는 선율은, 마치 긴 겨울 끝에 마주 앉은 오랜 친구의 다정한 대화처럼 들린다. 삶의 고통 속에서도 기어코 가치 있는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거장의 따스한 시선을 그대로 담아낸 음악이다.

베토벤은 음악의 사적 감정을 중요시하는 작곡가라 자신의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거의 없었고 이 작품의 제목 역시 후세 사람들이 그들의 느낌을 반영하여 붙인 제목이다. 그러나 음악이 주는 맑고 투명한 선율과 화음의 균형이 마치 꽁꽁 얼었던 겨울의 대지를 녹이는 봄의 기운과 닮아 있어서 참 잘 지어진 제목이다.

봄을 닮은 음악은 고해상도의 선명함보다는 뽀얀 먼지 속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함에 가까운 것들이 더 많다. 길가에 무심히 피는 야생화도, 점점 따스해지는 바람의 기운도 모두 조용히, 수줍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봄이 가진 매력이다. 이런 매력은 어떤 경로를 통해 듣느냐에 따라 느낌과 그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완벽한 디지털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봄의 정취를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통로로 '아날로그'라는 필터가 필요하다. 완벽하게 완성된 음원보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LP 판의 골을 타며 내는 그 미세한 '지지직' 소리가 봄의 음악을 듣기는 더 제격이다. 주변이 복잡하고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 변화 없는 일상의 지루함의 한계를 느낄 때 LP 판으로 들어보는 봄의 음악은 잊고 있었던 낭만을 다시 찾아줄 것이다. 턴테이블의 암(Arm)이 곡의 끝에 다다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정적의 순간이 바쁘고 변화가 빠른 삶을 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나른한 봄날 옛 음향이 주는 여유로움을 경험해 보는 것은 매우 특별한 순간이 될 것 같다. 아날로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기다림의 미학'을 마음껏 즐겨보면서 말이다. 이 계절의 변화를 데이터가 아닌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면, 오늘만큼은 조금 불편한 청취를 선택해 보면 어떨까? 지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피어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리가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품을 씨앗 하나를 심어 줄지도 모르니까...

/최현숙 침신대 기획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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