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읽기] 제8장-월평산성과 오누이 힘겨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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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읽기] 제8장-월평산성과 오누이 힘겨루기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3-31 15:59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월평산성 등 전국에 전해지는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누이가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편애와 방해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설화는 아들로 대표되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하는 여성이 억압당했던 과거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고발하며 그리스 신화와 유사한 비극적 서사를 보여줍니다. 민초들은 이러한 잔혹한 이야기를 통해 성별과 신분의 벽에 부딪힌 억울함을 달래고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저항 의지를 다지는 정서적 해소의 통로로 삼았습니다.

월평동 산성
월평동 산성/대전시 서구 제공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옛이야기 중에는 유독 가슴 아픈 비극이 많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용말강변의 아기장수와 오늘 전해드릴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이 비극들은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광포설화(廣布說話)로 내용이 조금씩 변형되어 각 지역의 지형지물에 얽힌 전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왜 이토록 잔혹한 이야기들을 즐겨 나누었을까요?

도솔산 자락에 자리한 월평산성은 남매의 전설이 깃들어 있어 남매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옛날 유성 땅에 홀어머니와 힘이 장사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매는 목숨을 건 내기를 벌입니다. 오빠는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고, 누이는 돌로 성을 쌓기로 했지요.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끔찍한 내기였습니다. 그런데 누이의 손이 더 빨랐습니다. 딸이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 와 척척 성을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조바심이 났습니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죽게 될 상황이었으니까요. 결국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딸에게 콩이 가득 든 밥을 내 놓습니다. 딱딱한 콩을 먹으며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오빠가 서울에서 돌아오지요. 누이는 성을 다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월평산성 중턱 성재에 남아있는 쌓다만 성벽이 바로 그 전설의 흔적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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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동 산성 남쪽성벽의 고대지 /안여종 대전문화유산 울림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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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발굴 당시 월평동 산성의 남쪽 성벽 노출 모습 /안여종 대전문화유산 울림 대표 제공
오누이 힘겨루기는 대개 성이나 다리의 유래로 전해집니다. 인근의 논산 석축산성과 공주 무성산성, 보은 삼년산성과 충주 장미산성 등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있지요. 진천의 농다리 전설에도 비슷한 서사가 등장합니다. 이곳에서도 남매는 죽음을 담보로 내기를 벌입니다. 누이는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고, 오빠는 송아지를 끌고 서울을 다녀오게 되지요. 누이가 거의 다리를 완성해 갈 무렵, 어머니는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먹이며 시간을 끕니다. 결국 오빠가 먼저 도착하고, 분노한 누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대결 구조는 그리스 신화의 아탈란테(Atalanta)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준마보다 빠른 발을 가진 아탈란테는 자신에게 청혼하는 남자들에게 목숨을 건 달리기 시합을 제안합니다. 멜라니온은 그녀를 이기기 위해 경주 도중 아프로디테에게 받은 황금 사과를 던지지요. 아탈란테가 눈부신 사과를 줍느라 늦어지는 사이 멜라니온이 승리하게 됩니다. 뛰어난 능력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도구인 황금 사과는 전설 속 콩밥이나 팥죽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월평산성의 비극은 개인의 호기심이 아닌 어머니의 편애와 선택에 의한 희생이었기에 더욱 더 처절하지요.

누이의 죽음은 아라크네(Arachne) 신화와도 맞닿아있습니다. 베 짜는 솜씨를 자랑하던 아라크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겨루어 뛰어난 작품을 만들지만, 신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분노를 사 거미로 변하는 형벌을 받아 영원히 실을 짜게 됩니다. 이는 신에게 도전한 오만함에 대한 처벌로 읽히지만, 그 이면에는 기존 질서와 충돌할 때 생기는 가혹한 응징이 담겨있습니다. 오누이 내기 또한 단순한 승패의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아들로 대표되는 기존체제를 지키기 위해 딸이 상징하는 유능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억압 당하는 것을 통해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던 당시 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처럼 잔혹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성별과 신분의 벽에 부딪혀 억울함을 당해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울분이 이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부당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위로를 받았고, 그 위로는 다시 변화를 꿈꾸게 하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을테지요,

전국 각지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극들은 민초들이 행한 가장 평화적이면서도 치열한 저항이자 억눌린 고통을 해소하는 정서적 통로가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렀으나 이야기는 살아남아 이름 없는 이들의 울분은 그렇게 곳곳의 전설이 되어 지금 이렇게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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