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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천 교수 |
전형필은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라는 선친의 뜻에 따라 일본 유학을 했지만 한국화가 고희동의 주선으로 평생의 스승인 오세창을 만나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과 그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라는 뜻의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받고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 내겠다고 결심하였다. 간송의 소나무는 추사 김정희가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주면서 인용한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즉,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라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더욱이 오세창으로부터 문화재를 보는 눈을 길러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으로 유출되는 우리의 서화와 전적들을 평생 동안 수집하고 보호하고 지켜 나가면서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간송은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대한제국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이용익이 고종 황제의 칙명을 받아 세운 보성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학급수를 늘리고 교실도 증축하는 등 많은 교육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1959년 보성학교에 막대한 재정 사고가 발생하자 간송은 이로 인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산을 처분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1962년 1월 26일 자택에서 향년 5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광복 후 그 진가가 빛을 발휘하여 많은 소장품이 국보, 보물,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그가 일본으로 팔려갈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거액을 주고 사들여 지켜낸 국보급 문화재로는 안견이 그린 산수화 <몽유도원도>, 신윤복이 작품 30장면으로 구성된 풍속화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고려청자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과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 『동국정운』(국보 제71호) 등과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단원 김홍도의 작품 외에도 서예, 도예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이 중에 백미는 단연코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1940년 경북 안동 이한걸 집안에서 발견되었고, 이한걸의 셋째 아들 이용준이 당대 최고의 국문학자인 김태준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간송은 1943년 6월에 김태준을 통해 당시 집 10채 값인 만원(현재 환율로 대략 70억 정도)을 주고 구입했으며, 간송은 6.25 전쟁 때에도 몸에 지니고 피난을 갔을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해방 이후 『훈민정음』(해례본)이 세상에 공개되었으며, 비로소 한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으니 여기에는 간송의 민족 문화에 대한 헌신과 열정 그리고 뛰어난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1938년에 성북동에 설립한 그의 개인 박물관인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보화각'에 보관하였는데 이 보화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간송은 해방과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리 문화재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큰 규모의 박물관 건립을 구상하였으며 교육 사업에도 매진하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 문화재는 사회에 헌납하여 오늘날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우리의 문화적 자존을 높여 주고 있다. 간송은 일제 강점기에 순경(順境)을 포기하고 역경(逆境)을 헤쳐 민족을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지사였다. 흰 눈 내리고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선생의 호인 '간송'의 의미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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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