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어느 날, 법치가 사라진다.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어느 날, 법치가 사라진다.

강병호 배재대 교수

  • 승인 2025-12-01 10:55
  • 신문게재 2025-12-02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강병호 배재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풍경소리
강병호 배재대 교수
법치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법조문은 남아 있고, 법원은 제시간에 열리며, 판사는 가운을 입고, 판결문에는 "법과 증거에 의하여"라는 문장이 적힌다. 그러나 그 법이 더 이상 부당한 권력을 심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이 그 법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시작하는 순간, 법치는 이미 속 잃은 껍데기가 된다. 독일과 홍콩,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이지만 법치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히틀러는 무력이나 비상조치를 동원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법률과 표결이라는 형식을 통해 체제를 장악했다. 1933년 독일 의회가 통과시킨 수권법(Erm?chtigungsgesetz)은 내각이 의회 승인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이어 제정된 '직업공무원제도의 복원에 관한 법'은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분류된 판사와 검사를 공무원직에서 배제했고, 판사들과 법률가 집단은 빠르게 정권 성향에 맞춰 필터링되었다. 1934년에 설치된 인민법원 (Volksgerichtshof)은 재판의 독립을 완전히 제거한 정치법원으로 전락해 수천 건의 사형과 수용소행 판결을 남겼다. 모든 과정은 법률 조항과 의회 표결이라는 외형을 지녔으나 실제는 사법부의 기능을 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봉사하도록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홍콩의 변화는 더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반환 초기 중국은 일국양제와 사법부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약속했지만, 2019년 송환법을 둘러싼 대규모 시위 이후 그 약속은 빠르게 후퇴했다.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은 전환점이 되었다. 법률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은 행정장관이 국가안보 사건 담당 판사를 직접 지정할 수 있도록 하여 독립적인 사건 배당을 무력화시켰다.

베네수엘라는 사법부 장악이 제도 개정이라는 합법적 외피 아래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04년 차베스 정부는 지금 한국의 민주당이 추진하는 것 같이 대법관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증원하는 법을 통과시키며 동시에 대법관 해임 절차를 완화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 개정이 정권에 유리한 판사들을 대거 임명하고 기존 판사들을 쉽게 내보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이 세 나라의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된 흐름은 분명하다. 먼저 위기를 명분으로 한 법 개정이 추진되고, 이어 사법부를 인사와 제도를 통해 서서히 길들이며, 법원 주변의 판사와 변호사들마저 스스로 위축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변질된다.

이제 눈을 한국으로 돌리면 우려스러운 징후들이 겹겹이 나타나고 있다.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에서 검찰이 항소 시한 직전 항소를 포기한 결정은 그 배경과 절차가 여전히 논란 속에 있다. 이 결정은 검찰권의 책임성과 정치적 중립성 논란과 맞물리며 국민의 의혹만 키웠다.

법원행정처 폐지 논의 역시 사법제도의 방향을 둘러싼 중대한 갈림길이다. 전문가들은 사법행정 권한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치권이 사법부 인사와 징계 구조에 개입할 여지를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공수처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에 대해 택시 애플리케이션 기록, 통화내역, 카드 사용 정보를 확보하려고 압수수색을 진행한 사건도 논란을 낳고 있다. 지 판사 개인의 비위 의혹이 사실이라면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직 법관을 수사기관이 직접 압수수색 한다는 것, 특히 그것이 진행 중인 내란 및 내란음모 혐의 재판들과 시기적으로 맞물린다는 점은 사법부의 독립성과 권력 균형에 훨씬 더 큰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사건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사법기관이 외부 권력과 정치적 논쟁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독일, 홍콩, 베네수엘라에서 보였던 패턴처럼, 법의 독립은 제도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정치권의 존재, 시민의 감시가 모두 결합할 때 비로소 법치는 유지된다.

결국 지금 한국에서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시민인가? 아니면 권력 주변 패거리인가? 법치는 단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타협과 관성 속에서 조용히 붕괴한다. 한국의 사법 현실을 둘러싼 최근 흐름은 법치가 흔들릴 때 나타나는 전형적 신호들과 겹쳐 보인다. /강병호 배재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날씨]대전·충남 1~5㎝ 적설 예상…계룡에 대설주의보
  2. '대통령 세종 집무실', 이 대통령 임기 내 쓸 수 있나
  3. 햇잎푸드, 100만불 정부 수출의 탑 수상... "대전을 넘어 전 세계로"
  4. 천안법원, 정지 신호에도 직진해 사망자 유발시킨 30대 중국인 벌금형
  5. 국제디지털자산위, 필리선 바타안서 'PPP 개발 프로젝트 밋업' 연다
  1. 대전시장 도전 許 출판기념회에 與 일부 경쟁자도 눈길
  2. 천안문화재단, 2026년 '찾아가는 미술관' 참여기관 모집
  3. 백석대, 천호지 청춘광장서 청년·시민 협력 축제 성료
  4. 단국대병원, 2025년 감염병 대응 유공기관 선정
  5. 상명대 창업지원센터장, '창업보육인의 날' 기념 충남도지사상 수상

헤드라인 뉴스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김민석 국무총리와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대전시와 충남도 행정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격 회동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얼마 전 충청권을 찾아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띄운 것과 관련한 후속 조치로 이 사안이 급물살을 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김 총리와 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15일 서울에서 오찬을 겸한 간담회를 갖는다. 김 총리와 일부 총리실 관계자, 대전 충남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회동에서 김 총리와 충청권 의원들은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 원도심 재편의 분수령이 될 '대전역 철도입체화 통합개발'이 이번엔 국가계획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4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초 철도 지하화 선도지구 3곳을 선정한 데 이어, 추가 지하화 노선을 포함한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종합계획' 수립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종합계획 반영 여부는 이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당초 국토부는 12월 결과 발표를 예고했으나,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과열되면서 발표 시점이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실제로 전국 지자체들은 종합..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