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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진 교수. |
계몽 이성과 과학기술은 마술이나 마법, 무속적 주술이나 유령을 미신이라 가르쳤다. 하지만 기술조차도 이젠 마술적 기술, 이미 그들이 배척 퇴치한 마법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중세의 여름은 아직도 한창이다. 과학과 합리적 이성으로 교화된 우리는 그럼에도 중세적 판타지 서사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이미 익숙하고 흥미롭게 경험했다.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 생자와 사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인간과 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환상, 이런 환상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중요한 미학적 구성 요소와 장치로 기능해왔다.
예컨대 팀 버튼의 영화들, 〈비틀쥬스〉와 〈가위손〉을 위시한 영화들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특유의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인해 네오고딕이라 부르기에 제격이다. 〈헤리포터〉와 같은 마법사 시리즈물, 세계적 거장 보르헤스와 마르께스, 그리고 카프카류의 소설, 우리 문학에선 김영하, 송경아, 최수철, 편혜영 등의 소설적 사례들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이르기까지 허다하다. 중세적 상상력에서 차용한 모티프, 그 중세적 환상과 상상력의 기괴한 세계가 뒤범벅된 서사와 현란한 시각 이미지는 허구적 이야기에서 불신유예라는 수용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중세주의는 갑자기 돌출한 현상이 아니다. 근대 계몽과 이성의 독재에 저항하는 곳에서 중세적 상상력은 늘 창조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예컨대 인간 중심의 낭만주의(romanticism)라는 용어 자체가 그러하며, 17~8세기 무렵 네오고딕이라는 건축 양식, 또 이와 연관하여 문학에서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고딕소설의 유행이 이미 존재했었다. 탈근대의 중세적 상상력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활한 중세의 망령은 비단 대중 예술이나 특정한 양식에만 국한하는 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신중세주의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이 용어는 세계화로 인해 개별 국가들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을 비유한 데서 비롯한다. 이제 한 국가는 과거처럼 자신의 영토 안에서 절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외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교황통치의 중세유럽과 EU, 십자군 전쟁을 방불케 한 부시의 신적 사명으로서의 성전과 지하드, 창조론의 다른 이름인 지적설계론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여기 저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또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중세적 증상은 불과 몇 해 전이나 지금도 경험하는 바이다. 가령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구속되자 영국의 〈가디언〉과 〈더 타임스〉는 박근혜와 최순실을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요승 라스푸틴의 관계에 비유했다. 라스푸틴은 권력을 주무르는 비선 실세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괴승이다. 그리고 친위 쿠데타로 탄핵 수감된 전 대통령 부부의 엽기적 기행과 퇴행의 비화들에서도 요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패망은 한 요승이나 법사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시대착오적인 무능이 근원이다. 여러 곳에서 중세의 망령은 힘이 세다.
김홍진 한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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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