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가을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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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가을 나들이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 승인 2025-11-04 16:44
  • 신문게재 2025-11-05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백향기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오래전에 읽은 법정 스님의 수필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들이 하기에 너무 좋은 청명하고 서늘한 가을날에 궁상맞게 방구석에 앉아 책을 끼고 있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것, 책은 모름지기 너무 무덥거나 추워서 바깥 출입하기 어려운 여름이나 겨울에 방에 조용히 들어 앉아 읽는 것이지 봄날이나 가을날에는 펼쳐진 자연을 즐기고 맛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는 글이었다. 어릴 적부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의심없이 들어 왔던 터라 신선하면서도 백번 공감이 가는 글이어서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가을이 오고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하면 법정 스님의 글이 떠오르곤 하는데 나들이 일정을 잡기가 만만치 않다.

정기적으로 해오고 있는 매어진 일정들이 있고, 전시회 등 여러 행사들이 가을에 집중해서 열리는 탓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번 여름은 무더위가 너무도 심해서 꼼짝않고 작업이나 하자 하고 작업실에 박혀 그리는 일만 반복하며 단순하게 보냈기 때문에 가을에는 작업실에서 벗어나 선선한 바람을 좀 쐬고 싶었던 것인데 그게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 것이다. 스님들은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를 통해서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에 정진하는 시간을 갖는다는데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나도록 매듭을 지어서 외부와 단절하는 시간을 갖는 지혜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하안거나 동안거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쉼의 시간을 갖는 기간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스님들에게는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수행에 몰입하는 기간을 갖고, 치열하게 수행 정진하는 시기인 것이다. 화가들이라면 여름 겨울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외부와 일체 단절하고 화실에서 치열하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일에 해당할 것이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3개의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20년 동안 하루에 16시간씩 방안에 갇혀 글을 썼고, 그 기간 동안 선생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래 선생은 이것을 스스로 '글감옥'이라 부르고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스님은 스님대로의 방식으로, 화가는 화가대로의 방식으로, 소설가는 소설가대로의 방식으로 집중적이고 밀도있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매진하는 것 하나만으로는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충분조건이 되기 어렵다. 스님들은 외부와 단절하고 치열한 수행에 정진하는 안거가 끝나고 해제가 되면 많은 경우 만행(萬行)을 떠나기도 하는데 만행이란 각지를 유랑하며 스스로의 견문을 넓히며 수행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배움의 나들이를 하는 것인데 한 곳에 앉아 공부나 좌선에 열중하는 일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여 자연과 접하고 여러 사찰을 돌며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안거 기간 중에도 좌선을 하면서 수행정진하지만 중간 중간 포행(布行)을 통해 간단한 산책, 걸으며 수행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걸으면서 자연을 접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수행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산책하면 대표적으로 떠 오르는 사람은 칸트이다. 그는 평생 정해진 시간, 정해진 코스를 매일 규칙적으로 산책하였다고 하는데 산책이 그의 사유를 확장시켜 주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와 같은 화가들에게는 다양한 체험이 사회적 경험일 수도 있고, 표현에 대한 다양한 사유일 수도 있고, 자연과 접하면서 갖게 되는 감성, 통찰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의 공통점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수행정진이나 밀도있는 작업에서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고, 자연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규칙적인 여백을 만들어 내서 일상의 흐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도 배경이 없는 사물, 여백이 없는 형태는 역동성을 갖기가 어렵다. 여백은 있어야 할 사물의 과감한 생략을 통해서 더욱 대상의 역동성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든 그것으로부터의 비움이나 이탈, 벗어남은 아마도 여백의 미로 인해서 더욱 역동적인 모습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가을에는 몸을 가벼이 하고 밖으로 나갈 일이다.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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