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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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 승인 2025-09-16 17:02
  • 신문게재 2025-09-17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백향기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옷장을 정리하는 일이다. 지난 계절에 입었던 옷들을 세탁하거나 손질해서 넣어두고 새 계절에 입을 옷들을 꺼내서 입기 편한 자리로 옮겨 놓는다. 그러면서 늘 하는 생각은 "무슨 옷들이 이렇게 많지?" 하는 것과 "그런데도 입을만한 옷은 왜 이리 없지?" 하는 것이다. 매년 되풀이 하는 일이고, 되풀이 하는 생각이다. 한 두벌로 한 계절을 나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정말 옷이 많다. 그 시절과 지금을 직접 비교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과하다 할 정도로 옷장에 옷들이 가득하다. 서민들의 형편은 뻔해서 당연히 비싼 옷들은 거의 없고 그때 그때 필요해서 부담없이 산 옷들이 대부분이다. 그게 자꾸 쌓여서 양이 많아진다. 아마도 어느 집이나 상황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말 힘든 일은 내년에 입을 옷을 박스에 넣고 새 계절에 입을 옷을 꺼내서 옷장에 거는 일이 아니라 박스에 넣지 않고 옷 수거함으로 보낼 것들, 작년에 넣어둔 옷들 중에 이 참에 수거함으로 보낼 것들을 결정하는 일이다. 분명히 작년에도 옷장에 걸려 있었지만 거의 입지 않았던 옷들이 여러 벌 있고, 이번 계절에 걸려만 있었지 한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 여러 벌 있는데도 선뜻 내놓아지지 않는다. 아마 입을 일이 있을지 몰라 하는 생각에 수거함으로 보내지 못하고, 이번 계절에는 입지 않았지만 내년에는 입을지도 몰라 하고 버리지 않고 박스에 잘 넣어 둔다. 심지어 조금 작아져서 입기 힘든 옷조차도 앞으로 살이 좀 빠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옷장은 늘 옷으로 가득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조금 과감해져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 생각이 났다. 하피첩은 직역하면 '노을 빛 치마로 만든 작은 책' 이라는 뜻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간 지 10년째 되던 해에 부인 홍씨가 낡은 치마를 유배지로 보내왔다.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고운 빛의 다홍치마는 바래서 노을 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산은 이 치마를 잘라서 종이를 덧대고 소책자로 만든 후 두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글을 적어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그 책자의 이름을 하피첩이라 지었다. 이 책에는 유배온 아버지를 둔 폐족의 자손으로서 기죽거나 혹시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식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 몸가짐은 어때야 하고, 어떤 친구를 사귀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등을 당부하는 글들을 적어 두었다. 그리고 남겨 두었던 나머지 조각들로는 유배갈 때 헤어진 여덟살 어린 딸이 어느덧 스물한 살이 되어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딸에게 그림을 그려 보내주었다.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있고, 가지 위에 참새 두 마리가 정겹게 노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이다. 벽에 세로로 걸만한 크기로 비단폭을 잘라서 위에는 그림을 그리고 아래에는 시가 적어 놓았다.

"포롱포롱 날아온 새 우리집 매화 가지에 앉아 쉬네 / 매화 향기 짙으니 기꺼이 찾아왔겠지 / 여기 머물고 깃들어 가정 이루고 즐겁게 지내려무나 / 이제 꽃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열리겠네" 빛바랜 비단 치마 폭 위에 절절한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는 듯해서 가슴이 시리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가 오랜 세월이 지나 빛바래서 노을빛으로 변하고 그것을 어머니는 유배지에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 그리고 낡은 치마를 잘라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 정겨운 한 쌍의 새를 그려 주었다.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낡은 치마가 이렇듯 가슴 절절한 서사를 갖고 새로운 생명을 갖고 전혀 다른 아름다운 그림으로, 시로 다시금 태어난 것이다.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은 이렇게 적혀 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치마를 잘라 한편으로는 흐트러짐없는 엄격함을, 한편으로 지극히 깊은 사랑을 가득 담아 놓았으니 검약하고 엄격하되 마음이 풍요로운 삶의 자세를 그에게 배울 일이다.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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