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결혼·여름'을 읽으며 보낸 여름의 시간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결혼·여름'을 읽으며 보낸 여름의 시간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5-09-08 10:19
  • 신문게재 2025-09-09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풍경소리 김태열 수필가
김태열 수필가
무더운 여름이 그림자 길이가 길어진 만큼 물러났다. 올해 여름은 무서운 발톱을 가진 호랑이처럼 순식간에 폭염과 폭우로, 열대야로 국토를 덮쳤다.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안고 여름은 물러났다. 그래도 여름이 있어 세상은 정열적이었다. 온통 즐길 거리 먹거리 볼거리가 넘쳐났다. 젊음의 열기로 대전을 뜨겁게 달군 8월의 0시 축제, 보령의 머드 축제도 끝났다. 이제 시선은 벌써 12월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한자에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대표적인 단어로 열(悅)과 락(樂)이 있다. '열'은 내부에서 차오르는 희열을 뜻하는 데 반해 '락'은 바깥으로부터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오늘날은 쾌락(快樂)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도파민 충족사회라 더 자극적인 즐거움을 찾는다. '열과 락'이 함께 들어 있는 가장 오래된 구절은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었을 논어 첫 장에 나온다. 배우고 자주 익히면 어찌 기쁘지(悅) 않겠는가. 먼데 있는 벗이 찾아와 준다면 어찌 즐겁지(樂) 않겠는가.

유교 문화권에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학(學)이라는 글자를 참 좋아했다.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여는 것이기도 하지만 험난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자기만의 성 쌓기와 같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배움은 제한적이기에 현대인들은 책,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기만의 배움의 기쁨을 찾는다.

한 달에 한 번 가지는 문학 독서 모임이 있다. 일 년 동안 읽고 싶은 책 12권을 선정해서 매달 1권씩 감상문을 써서 나눈다. 지난여름에는 '이방인'과 '페스트', '시지프 신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베르 카뮈의 '결혼·여름' 읽고 소감을 나누었다. 2시간여의 모임이 끝난 후 가슴속에 잔잔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올라왔다. 돈이나 명예가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지도 않고 스스로 좋아서 할 뿐인데도 나이 듦에 같은 곳을 바라보며 길을 가는 친구들이 있어서 즐겁다는 생각까지 끌고서 말이다.



'결혼·여름'은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으로 유명한 카뮈의 에세이다. 그가 향후 전개할 부조리 철학의 맹아를 품은, 문학의 영롱한 원석 같았다. 20대 청춘에 쓴 '티파사에서의 결혼'에서는 '오직 햇살,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 삶'을 읊조린다. 현재가 아닌 다른 시점에 시선을 가두는 삶은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므로 그런 인생은 불행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삶의 부조리를 깊이 자각한 후 쓴 '티파사에 돌아오다'에서는 '여름의 도시로 남아있는 티파사가 갑자기 겨울의 도시로 변해 웃음이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겨울 한 가운데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여름이 있다'라며 희망을 품는다.

글쓰기는 깊이 있는 독서를 거쳐야 한다. 대가들의 책을 읽으면 그냥 대가가 아니다. 그들은 젊을 때부터 치열한 독서를 통해 사유를 다듬고 다듬어 자기만의 문체로서 독자에게 영감을 주기에 불멸의 작가로 남은 것 같다. 나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왜소한 학생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들과 벗하고 싶다.

우리는 선정된 책을 꼼꼼히 되풀이 읽고 융합하여 자기만의 글로 펼친다. 저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느끼는 곳이 다름에 흥미를 느낀다.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때론 공감하며 뛰어난 점을 발견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우리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희열을 우정으로 나누고 싶은 것이지 타인의 인정 같은 목적을 미래에 투영하지 않는다. 벗과 더불어 카뮈와 함께 지냈던 여름의 시간은 행복했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책을 읽어 학습해도 우리의 이런 기쁨을 대신할 수는 없으리라.

인연 따라 스며들었다가 흘러가는 세상이다. 부조리한 삶에서 무엇을 기약하며 기대할 것인가. 그냥 할 수 있는 자기 몫만 하고 떠나면 그뿐이다.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문득 벗들과 나누었던 기쁨의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과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으면 잘 놀다(遊)가는 삶은 아닐지. 김태열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지역 9개 대학 한자리에… 대전 유학생한마음대회 개최
  2. [편집국에서]배제의 공간과 텅빈 객석으로 포위된 세월호
  3. "광역교통망 수도권 빨대 효과 경계…지역주도 시급"
  4. ‘수험생 여러분의 꿈을 응원합니다’
  5. 태권도 무덕관 창립 80주년 기념식
  1. [건강]대전충남 암 사망자 3위 '대장암' 침묵의 발병 예방하려면…
  2. 대청호 녹조 가을철 더 매섭다…기상이변 직접 영향권 분석
  3. 대전시의회 행정사무감사 돌입…한화볼파크 계약 행정 실효성 부족 도마 위
  4. [대입+] 2026 수능도 ‘미적분·언어와 매체’ 유리… 5년째 선택과목 유불리 여전
  5. 대전시의회 교육위 행정사무감사…학폭 예방 교육 실효성·대학 사업 점검

헤드라인 뉴스


조선선박 600년만에 뭍으로… ‘태안 마도4호선’ 인양 완료

조선선박 600년만에 뭍으로… ‘태안 마도4호선’ 인양 완료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현존 유일의 조선시대 선박이 '마도4호선'이 600여 년 만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지난 4월부터 태안 마도 해역에 마도4호선의 선체 인양 작업을 진행해 지난달 완료했다고 10일 밝혔다. 마도4호선은 10년 전인 2015년 처음 발견됐으나 보존 처리를 위해 다시 바닷속에 매몰했다가 10년 만에 인양됐다. 연구소에 따르면, 이 선박은 15세기 초에 제작된 조운선(세곡 운반선)으로, 전라도 나주에서 세곡과 공물을 싣고 한양 광흥창으로 향하던 중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꽃축제, 대전 하늘에 수놓는다"...30일 밤 빛의 향연
"불꽃축제, 대전 하늘에 수놓는다"...30일 밤 빛의 향연

이장우 대전시장은 10일 주재한 주간업무회의에서 한화 불꽃축제 개최의 안전대책과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 확대, 예산 효율화 등을 지시했다. 이 시장은 대전시 한화 불꽃축제 개최와 관련해 "축제 방문자 예측을 보다 넉넉히 잡아 대비해야 한다"며 "예측보다 더 많은 방문객이 몰리면 안전과 교통에 있어 대책을 담보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화구단은 30일 한화이글스 창단 40주년과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기념해 대전 엑스포과학공원 및 엑스포다리 일원에서 불꽃축제를 개최한다. 불꽃놀이와 드론쇼 등 대규모 불꽃 향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이 시장은..

[대전 유학생한마음 대회] "코리안 드림을 향해…웅크린 몸과 마음이 활짝"
[대전 유학생한마음 대회] "코리안 드림을 향해…웅크린 몸과 마음이 활짝"

8일 대전시사회서비스원이 주최한 2025년 제9회 대전 유학생 한마음 대회를 방문했다. 대전 서구 KT인재개발원 실내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마주한 건 엄청난 활기였다. 제기차기, 딱지치기, 투호 등의 한국 전통 놀이를 850명 가까운 유학생들이 모여 열중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아쉬움의 탄성, 그리고 땀과 흥분으로 데워진 공기에 늦가을의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후끈 달아오른 공기는 식을 틈이 없었다. 이어진 단체 경기, 그중에서도 장애물 이어달리기는 말 그대로 국제 올림픽의 현장이었다. 호루라기가 울리..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답지 전국 배부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답지 전국 배부

  • ‘보행자 우선! 함께하는 교통문화 만들어요’ ‘보행자 우선! 함께하는 교통문화 만들어요’

  • ‘수험생 여러분의 꿈을 응원합니다’ ‘수험생 여러분의 꿈을 응원합니다’

  • ‘황톳길 밟으며 가을을 걷다’…2025 계족산 황톳길 걷기대회 성료 ‘황톳길 밟으며 가을을 걷다’…2025 계족산 황톳길 걷기대회 성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