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평가의 막강한 힘과 오남용의 위험성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평가의 막강한 힘과 오남용의 위험성

김정태 배재대학교 글로벌자율융합학과 교수

  • 승인 2025-08-18 10:52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2024010801000544400020711
김정태 교수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평가를 하고 평가를 당한다. 음식을 먹을 때나, 직장과 사회 속에서 누군가를 평가하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매 순간 평가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험처럼 제도화된 평가는 단순한 판단을 넘어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막강한 힘을 갖는다. 문제는 이 힘이 공정하게 쓰이지 않을 때 평가는 곧바로 권력의 도구가 되어 개인과 집단을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곤 했다.

역사적으로 고부담 평가는 그 결과가 오남용될 때 막대한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성경 사사기 12장에는 이스라엘 내전에서 패잔병들을 색출하기 위해 발음을 시험한 이야기가 나온다. 패잔병들에게 '쉽볼렛'이란 단어를 말하게 하고, 이를 '십볼렛'으로 발음하면 곧바로 처형시켰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가 무려 4만 2000명에 달했다. 이는 언어평가가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송두리째 앗아간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도 평가는 권력의 정치적 의도에 봉사하는 장치로 활용됐다. 1901년부터 1958년 폐지될 때까지 시행되었던 '받아쓰기시험'은 백호주의 정책하에 비유럽인의 이민을 막기 위한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불특정 유럽 언어로도 실시가 가능했다. 입국심사관이 임의로 선택한 언어로 50단어 문장을 불러주면 이민 신청자는 그것을 정확히 받아써야 했다. 결과는 뻔했다. 아시아인과 비유럽인의 이민은 거의 차단됐다. 언뜻 보면 중립적인 평가 도구가 사실상 차별과 배제의 제도적 장치로 악용된 것이다.

1927년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캐리 벅 사건도 평가 오남용의 상징적 사례였다. 당시 법원은 우생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바보는 3세대로 충분하다"라며 캐리 벅의 강제 불임수술을 합법으로 판결했다. 사실 캐리와 어머니 엠마, 딸 비비안의 지능이 낮다고 판단했던 근거는 왜곡된 기본지능검사의 결과였다. 그러나 나중에 캐리와 비비안은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곡된 평가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판결은 결국 수만 명의 강제 불임수술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평가는 역사적으로 한 사회에서 권력의 필요에 따라 조작되고 남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언제나 힘없는 개인과 소수자에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대학입시제도를 둘러싼 현실을 들여다보면, 과거의 사례와 정확히 닮아 있다.

한국의 대학입시는 수시와 정시로 운영되며, 수능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학생의 대학 진학을 사실상 결정짓는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인생이 걸린 시험'이라는 압박감 속에서 수년간을 살아간다. 수능이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관문으로 기능한다. 이로 인해 입시는 계층 재생산의 도구가 되고, 대학 서열화와 계급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 과정에서 교육 본연의 목적은 뒷전으로 밀려나 학생들은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나 협업 능력 대신, 문제풀이 기술을 익히는 데 몰두한다. 예체능과 인성 교육은 소외되고, 오직 점수만이 학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 부작용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악화로 이어져 매년 증가하는 우울증, 불안장애, 극단적 선택의 원인이다. 동시에 사교육 과열은 가계 부담을 키우고, 계층 간 교육 격차를 더욱 심화시킨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역대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입시지옥 해소'를 약속했으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했는가? 그 배경에는 대학 서열 체계와 이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가 뿌리 깊게 얽혀 있다. 대학입시제도의 개혁은 단순히 시험방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를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투명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평가는 인간 사회에서 없어질 수 없는 제도다. 수능을 포함한 현행 입시제도가 가진 모순과 부작용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은 분명하다. 평가가 권력의 도구가 될 때 사회는 병들고, 결국 피해는 미래 세대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질문과 실질적 변화다. 우리는 고부담 평가의 역사적 교훈을 거울삼아 AI 시대에 걸맞는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평가체제를 만들어가야 한다. 평가가 더 이상 두려움의 이름이 아니라 희망을 열어주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김정태 배재대학교 글로벌자율융합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학교 급식 파행 사태 초등학교까지 번지나…학부모 우려
  2. 길고 길었던 실종자 수색…76시간 만 극적 발견
  3. 대전변호사회, 경찰 형사사건 처리 업무평가 첫 시행
  4. [인터뷰] '운동하고 연구하는' 정형외과 의사…유현진 전문의 "수술과 재활진료가 본질"
  5. 행정수도 완성 논의 본격화... "법적지위 부여 적극 추진"
  1. 32사단, 대량살상무기 대응 통합훈련 실시
  2. 전문대, 내년 수시모집 15만명 선발… 충청권 1만 8081명
  3. 세종지역 초등 저학년 학교폭력 땐 '숙려기간' 준다
  4. 충남대병원 대전치매센터, 공공후견인 간담회 및 교육 열어
  5. 대전 전교조·인권단체 '대전판 리박스쿨' 청소년 기관 수탁 규탄

헤드라인 뉴스


특별법 국토소위 회부…행정수도 완성 열차 시동

특별법 국토소위 회부…행정수도 완성 열차 시동

국가균형발전 백년대계이자 560만 충청인의 염원인 행정수도특별법이 21일 입법화를 위한 첫 관문인 상임위원회 소위에 회부됐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우리나라 정부부처 3분의 2가 집적돼 있으며 대통령실과 국회 기능 이전이 예정된 세종시에 명실상부한 행정수도 법적 지위를 부여 하기 위한 입법화 여정이 개문발차한 것이다. 행정수도특별법은 대통령실과 국회를 세종시로 완전 이전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 이날 전체회의에는 더불어민주당 강준현 의원(세종을) 안(案)과 조국혁신당 황운하 의원(비례) 안..

한문희 코레일 사장 사의표명... 철도작업자 사망에 책임 통감
한문희 코레일 사장 사의표명... 철도작업자 사망에 책임 통감

한문희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이 19일 발생한 남성현~청도 작업자 사고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21일 코레일은 공식 발표를 통해 한 사장은 "철도 작업자 사고 발생에 대해 유가족과 국민께 깊이 사과드리고,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고현장에서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사표는 아직 수리되지 않았다. 한 사장의 임기는 내년 7월 23일 임기가 끝난다. 19일 10시 50분쯤 경부선 남성현~청도역 간 운행하던 제1903호 무궁화호 열차가 수해지역 비탈면 안전 점검을 위해 이동 중이던 작업자와 접촉하는 사고가 발생해 2명이..

충남도 `호우 피해 지원금 현실화` 요구… 정부 "추가 지급 결정"
충남도 '호우 피해 지원금 현실화' 요구… 정부 "추가 지급 결정"

충남도가 지난달 기록적인 폭우에 따른 지원금을 정부에 지속 건의한 결과, 정부가 추가지원을 결정했다. 21일 도에 따르면 지난달 22일 폭우 피해 지원대책 기자회견에서 정부에 피해 지원금 현실화를 건의하겠다는 입장 발표를 시작으로, 정부부처의 현장점검 등에서 '호우 피해 지원금 현실화'를 요청해 왔다. 김태흠 지사도 1일 열린 대통령 주재 제1차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분야별 지원금 현실화를 공식 건의한 바 있다. 당시 김 지사는 농업 분야와 관련해 정부의 지원기준인 복구비(대파대) 50%를 100%로 상향하고 농업시설 복구비도 기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드론테러를 막아라’ ‘드론테러를 막아라’

  • 폭염에도 가을은 온다 폭염에도 가을은 온다

  • 2025 을지훈련 시작…주먹밥과 고구마로 전쟁음식 체험 2025 을지훈련 시작…주먹밥과 고구마로 전쟁음식 체험

  • 송활섭 대전시의원 제명안 부결…시의회 거센 후폭풍 송활섭 대전시의원 제명안 부결…시의회 거센 후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