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인칼럼]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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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인칼럼]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남긴 숙제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

  • 승인 2025-08-03 11:18
  • 신문게재 2025-08-04 18면
  • 박병주 기자박병주 기자
정흥채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
드디어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옥죄던 연구과제중심제도(PBS, Project-Based System)가 폐지된다. 1996년 도입된 PBS는 출연연에 '성과 중심의 자율 운영'을 정착시키기 위해 도입됐다. 당시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방만한 연구 행정과 성과 부재에 대한 개선 요구가 거세졌다. PBS는 연구자에게 외부 과제 수주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고, 시장 경쟁 구조를 통해 효율적인 연구를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시행됐다.

제도 도입 초기 PBS는 가시적 성과를 보였다. 연구자가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기획력과 추진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민간 및 대학과의 협업도 활발해졌다. 연구비 집행의 투명성도 높아지며 '책임 연구자' 개념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고, 출연연 자체의 경쟁력 제고에도 도움이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의 구조적 한계가 뚜렷해졌다. PBS의 핵심은 연구자의 인건비가 외부 과제에 연동된다는 점인데, 이 구조는 연구자에게 과도한 과제 수주 압박을 가하는 원인이 됐다. 인건비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과제가 '남발'되었고, 단기성과를 우선시하는 풍토가 형성되면서 기초·장기·도전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이 과정에서 연구의 질은 저하됐고, 과제 수주 경쟁은 과중한 행정 부담을 초래했다. 경쟁은 연구현장에서도 여지없이 적용됐다. 연구자는 창의적 기획자라기보다는 '영업자'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PBS는 연구기관 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제 수주 실패는 곧 인력 감축 및 조직 축소로 연결되었고, 기관의 전략적 연구역량은 파편화됐다. 특히 비정규직 연구 인력 비중이 크게 증가하며,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직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연구 몰입 환경이 무너졌고, 연구의 본질보다 과제성과가 중요시되는 구조는 국가 R&D 전략과의 괴리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PBS 폐지는 단순한 제도 종료가 아니라,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철학적 전환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가 밝힌 바와 같이, 출연금 중심의 안정적인 예산 구조로 전환하기 위해 당장 내년부터 종료되는 사업 예산은 출연금으로 전환되지만, 정부 통제 강화의 우려는 가장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연구기관의 자율성과 책임 경영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다. 정부는 PBS의 폐지를 통해 단기성과 중심의 R&D 생태계를 개편하고자 하나, 이 과정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PBS 폐지 이후 요구되는 과제는 다양하다. 첫째, 출연연의 고유한 역할과 임무를 반영한 맞춤형 예산 배분이 필요하다. 단순히 일괄적인 출연금 확대가 아니라, 기관의 특성과 장기적 전략을 고려한 재정 설계가 핵심이다. 둘째, 연구자의 평가 및 보상 체계를 다면화해야 한다. 성과 수치가 아닌 창의성, 협업, 기여도 등을 반영하는 평가로 연구자를 보호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특히 조직적 협업을 유도할 수 있는 보상체계는 파편화된 연구조직을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셋째, 연구 생태계의 다양성과 포용성 확보가 필요하다. 여성 과학자, 젊은 인재, 다분야 협업 연구자들이 안정적 연구 환경에서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PBS의 폐지는 연구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과학기술을 단기성과와 경쟁의 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 과정으로 인식할 것인가. 연구자는 단순한 예산 집행자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제도를 폐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제도 너머의 철학, 즉 '어떤 연구자상을 그릴 것인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PBS는 과거 성과주의적 경쟁을 통해 과학기술계를 변모시키려 했지만, 이제는 협업과 신뢰, 전략과 포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점이다. PBS 폐지는 퇴행이 아닌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기관·연구자 모두의 철학적 성찰과 정책적 창조가 요구된다.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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