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임금(賃金)은 한 가정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 오피니언
  • 세상속으로

[세상속으로]"임금(賃金)은 한 가정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 승인 2025-07-28 14:08
  • 신문게재 2025-07-29 18면
  • 이상문 기자이상문 기자
박지숙 대전고용센터 팀장
박지숙 대전고용센터 팀장
1882년 여름, 조선의 구식 군인들은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 마침내 지급된 배급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결국 참다못한 병사들은 무기를 들었다. 이후 청일전쟁과 갑신정변의 원인이 된 이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군인들의 폭동, 그 근저에는 '임금체불'이라는 생존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를 넘긴 임금체불'이 이후 사회·정치·외교 전반에 걸쳐 조선 사회를 뒤흔든 역사적 대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임오군란에 앞서서도, 1863년(철종14년)의 금위영 군병 소요와 1877년 훈련도감 군병 소요 등 봉급 미지급으로 인한 사건들이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었다.



1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자. 2025년 5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임금체불 규모는 9482억원에 달했고, 피해 근로자 수는 11만 7235명에 이른다. 이 추세라면 연말까지 체불액이 사상 최대치를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일을 하고도 제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것은 구조적이고 반복되는 사회 문제임을 보여준다.

특히 임금체불은 규모가 작은 사업장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전체 임금체불의 71%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고, 피해 근로자의 65% 이상이 5~29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한 근로자였다. 5인 미만 사업장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소규모 사업장에서 경영난을 이유로 임금을 가장 먼저 미루는 일이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이러한 체불의 원인이 단순한 경영난 보다는 상당수 사업주의 인식과 대응 방식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임금을 법적 의무가 아닌 '지급 유예가 가능한 항목'으로 여기는 태도가 체불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과 제도가 있어도 체불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는 임금 채권을 파산 시 우선변제 대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임금 체불 시 정부가 먼저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대지급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대지급금 이후 회수율은 2023년 기준으로 30%대에 머물고 있다. 사업주가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한국 특유의 기업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미덕으로 삼던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는 직장을 또 하나의 가정으로 여기게 했고 여기에 수직적 상하관계까지 더해져 사업주는 가부장의 권위를 획득했다. 직원도 가족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임금체불은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경영난이라는 상황을 참작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사정쯤으로 치부되고 사업주에게 곧장 법적 책임을 묻는 것도 한국인의 정서로는 낯선 것이었다.

지금 당장 이번 달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 학원비, 부모님 병원비, 통신비, 월세, 식비까지 생각만 해도 막막해진다. 한 달, 두 달 임금이 밀리는 순간, 단지 근로 대가가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 전체의 생활이 불안으로 뒤덮인다. "한 사람의 임금은 한 가정의 삶이다"라는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 전체의 생존을 뒤흔드는 절박한 현실이다.

이제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사업주의 임금 지급은 선택이 아니라 법적 의무이며, 사회적 약속이다. 임금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때 지급해야 하는 책임이다. 우리는 임금체불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한 가정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해야 한다.

임오군란은 오래전 일이지만 임금체불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로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건이다. 일한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대가를 제때 지급하지 않으면 민심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흔들린다. 임금은 사회의 근간이자 한 가정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충남 통합논의"…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2. '물리적 충돌·노노갈등까지' 대전교육청 공무직 파업 장기화… 교육감 책임론
  3.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4. 충남경찰 인력난에 승진자도 저조… 치안공백 현실화
  5. 대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 열려
  1.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2. 대전 동구, '어린이 눈썰매장'… 24일 본격 개장
  3. 대전충남 행정통합 발걸음이 빨라진다
  4. 이대통령의 우주청 분리구조 언급에 대전 연구중심 역할 커질까
  5. [기고] 한화이글스 불꽃쇼와 무기산업의 도시 대전

헤드라인 뉴스


10·15부동산 대책 2개월째 지방은 여전히 침체… "지방 위한 정책 마련 필요" 목소리

10·15부동산 대책 2개월째 지방은 여전히 침체… "지방 위한 정책 마련 필요" 목소리

정부 10·15 정책이 발표된 지 두 달이 지난 가운데, 지방을 위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 3단계가 내년 상반기까지 유예되는 등 긍정적 신호가 나오고 있지만, 지방 부동산 시장 침체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다. 15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누적 매매가격 변동률(12월 8일 기준)을 보면, 수도권은 2.91% 오른 반면, 지방은 1.21% 하락했다. 서울의 경우 8.06%로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린 반면, 대전은 2.15% 하락했다. 가장 하락세가 큰 곳은 대구(-3...

‘의료 격차 해소·필수의료 확충’ 위한 지역의사제 국무회의 의결
‘의료 격차 해소·필수의료 확충’ 위한 지역의사제 국무회의 의결

의사가 부족한 지역에서 10년간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소위, ‘지역의사제’ 시행을 위한 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출산과 보육비 비과세 한도 월 20만원에서 자녀 1인당 20만원으로 확대하고, 전자담배도 담배 범위에 포함해 규제하는 법안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제54회 국무회의에서는 법률공포안 35건과 법률안 4건, 대통령령안 24건, 일반안건 3건, 보고안건 1건을 심의·의결했다. 우선 지역 격차 해소와 필수의료 확충,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지역의사의 양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공포안’..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제2문화예술복합단지대·국현 대전관… 대형 문화시설 `엇갈린 진척도`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제2문화예술복합단지대·국현 대전관… 대형 문화시설 '엇갈린 진척도'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대전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 ‘헌혈이 필요해’ ‘헌혈이 필요해’

  •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