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
세상 근심은 아무래도 온갖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고, 최고 권력자가 된 이재명 대통령이 과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자 염려일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해 12·3 비상계엄으로 시작되어 탄핵과 대선으로 이어진 정국은 백척간두의 위기 국면들로 점철됐고,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은 극에 달했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새롭게 정상화된 정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모적인 열정이나 쓸데없는 기우(杞憂)에 휩싸여 있다. 단적인 예로, 어떤 이들은 무너진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위헌·위법한 국정을 주도했던 세력을 남김없이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국민주권 정부를 표방한 이재명 정부가 일당 독재로 흐를 것이라는 적개심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주장들은 권력 논리나 진영 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뭔가 그럴듯하지만, 정치과학적 차원에서 판단하면 사실 왜곡이자 인지부조화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왜곡이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대중매체나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식자들을 거치면서 '확증 편향'의 고리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시금 총칼 없는 내전이나 정치적 방화를 조장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마도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세상 근심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일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세상 근심은 다반사이기에, 그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은 어쩌면 시간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세상 근심을 잘 다스리는 방안에 대해 나름대로 피력하고 싶다. 필자는 감히 '관용'과 '관조'의 자세를 다시 한번 성찰해볼 것을 제안하려고 한다. 관용(寬容)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데,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관조(觀照)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을 뜻하는데,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 두 미덕(virtue)은 이해하기에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역사적 사례를 접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중국 주나라의 무왕은 은나라의 폭군인 주제를 응징했지만, 그의 아들에게 봉토를 주어 제사를 잇게 했다. 또 플루타르코스의 '대비 열전'에 따르면, 로마 공화국 말기 공화주의자인 키케로는 독재자인 카이사르의 후예들과 싸움에서 실패해 죽음 앞에 섰지만, 패배자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지난 대선에서 이긴 자나 진 자, 승리한 진영이나 패배한 진영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처지에서 관용과 관조를 되새긴다면, 장삼이사(張三李四)인 보통 사람들의 근심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특히 승리한 쪽은 겸허함과 자제,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반면에 패배한 쪽은 깨끗한 승복과 성찰, 환골탈태로 나아간다면,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크게 올라갈 것이다.
한편 관용과 관조는 정치지도자가 통합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통합이라는 용어를 다섯 번이나 언급해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중(노태우 1, 김영삼 0, 김대중 0, 노무현 4, 이명박 1, 박근혜 0, 문재인 2, 윤석열 0) 가장 많이 사용했다. 물론 단어의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통합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공하는 지도자는 통합, 용기, 통찰이라는 정치적 덕목을 지녀야 국정 성과를 내고,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이들 덕목은 관용과 관조에서 비롯된다. 후자가 뿌리에 해당한다면, 전자는 꽃이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관용과 관조와 관련해 덧붙이자면, 정치지도자는 진정성과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분노했다"거나 "격노했다"는 표현이 대중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도자의 분노나 조급함은 '국민과의 정'을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유재일 사회공헌연구소 대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