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중략)
민족의 애창곡인 '봉선화(鳳仙花)'의 노랫말이다. 1920년 홍난파가 곡(曲)을 쓰고, 5년 후 김형준이 작시(作詩)하여 탄생한 한국 가곡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이 노래는 애절한 곡조와 중의적 의미를 더해 한민족만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녹아 있다. '울타리'나 '펜스(fence)'로 대신할 수 없는 첫 소절의 '울(柵)'이라는 한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아르르 저며 온다.
며칠 전,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돌담풍경마을'에 다녀왔다. 상신리는 큰 웅덩이가 있어 신소(莘沼)라고도 불리는 부락이다. 고개를 들면 계룡산 봉우리들이 눈에 차고, 발길 닿는 곳마다 경쾌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마을 어귀에는 장승과 솟대, 선돌이 서 있고, 마을 주산에 산신당을 모시고 매년 일정 시기에 마을 단위의 제를 올리는 토속신앙이 남아 있다. 근래에는 계룡산도예촌과 농촌체험휴양마을이 조성돼 타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상신리 돌담풍경마을은 큰 샘을 중심으로 100여 호가 모여 살던 동네를 말한다. 그림처럼 예쁜 사계절 풍경과 산천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다 담장을 올린 옛집들이 곱게 어우러져 있다. 서울의 덕수궁 돌담길처럼 세련되고 정갈한 느낌은 없다. 낮은 담장 너머로 집안 세간살이가 드러나는 상신리 돌담풍경마을 골목길을 걷노라면 오래 살아온 고향의 포근함이 전해진다. 봄에는 빈 나뭇가지에 용쓰듯 새싹이 올라오고, 여름이면 담장 위로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담장 너머 키 큰 감나무에 붉은 감이 매달린 가을 풍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상신리 돌담길은 잔설과 찬바람을 견디는 나목뿐인 한겨울에도 금세 친근함을 느낄 만큼 매력적이다.
더러 흙담이나 돌담 대신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허름한 가옥도 보인다. 일 나간 주인 대신 홰치는 닭들과 충직한 멍멍이 한 마리가 집을 지킨다. 해바라기하던 고양이 한 마리는 낯선 이와 시선이 마주쳐도 놀라거나 황급해하지 않는다. 남의 동네 길모퉁이에서 만나는 익숙한 풍경에 갑갑하던 숨통이 트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가가호호 활짝 열렸던 대문은 굳게 닫히고,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담을 쌓은 주택이 늘어갔다. 급기야 높은 담장 위에는 무시무시한 쇠꼬챙이와 사금파리, 조각낸 유리 조각이 촘촘히 박히기까지 했다. 봉선화가 줄지어 피던 싸리나무 울타리, 동네 코흘리개들의 스케치북 대용이던 담벼락이 사무치게 그립다. 하시절(何時節), 급변하는 세태에 힘겹게 순응하며 살다가 아스라이 어른거리는 우리네 소박한 풍경에서 삶의 쉼표를 찍어 본다.
박진희 명예기자(한국)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