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어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어

여지민 온양천도초등학교 교사

  • 승인 2023-11-16 16:49
  • 신문게재 2023-11-17 18면
  • 김성현 기자김성현 기자
여지민 선생님 (3x4cm)- 반명함용 jpg
여지민 교사.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서 그런가. 내가 잘 가르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숱하게 토로했다. "직업의 기쁨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선생님은 언제 보람을 느끼세요?" 여쭤보기도 여러 번이었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집필하신 교육서적도 뒤적이고, 현장에서의 노하우를 담은 에세이도 수차례 들췄다. 해답을 갈망할수록 길은 보이지 않고 좌절만 깊어졌다. 다들 각자의 철학과 경험이 한 보따리인데 나만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

흡사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의 마음이었다. 따뜻한 배움이 일어나길 바랐고, 아이들의 성품이 성장하며 단단해지길 바랐다. 우리의 작은 세상에 맑은 샘물을 만들고 싶어 고군분투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선생님으로서의 기쁨과 보람도 느끼고 싶었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배움의 샘물'은 마치 신기루 같아서 한 뼘 다가가면 어김없이 또 멀어졌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에게서 무엇이라도 배웠을까?' 매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자기 의심이 버거워 올해는 차라리 내려놓음을 연습하기로 했다. 그러자 뒤늦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보인다.

수학 시간엔 칠판에 문제를 쓴다. 도전해보겠다는 아이들이 손을 든다. 한 아이가 칠판 앞에서 긴장했는지 실수를 하고 만다. 몇몇 아이들이 훈수를 두었을 때, '선생님은 친구가 다시 풀 수 있게 기다려줄 거야. 너희는 응원해줘.' 말한다. 그러자 한두 아이의 목소리에서 시작한 '유 캔 두 잇!'이라는 구호가 어느덧 모든 아이의 목소리가 됐다. 지금도 교실에서 작은 실수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는 놓치지 않고 선창한다. '유 캔!' 매번 아이들이 응답하는 목소리가 정겹다. '두 잇!'



미술 시간엔 '선생님 소원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열심히 색칠해서 진짜 멋진 협동화를 완성해보는 거야.' 덧붙였다. 그러자 평소 가까웠던 친구들과 서먹했던 친구들이 모두 얼굴을 맞대고 색연필을 고른다. '내가 왼쪽 나무를 이 색연필로 칠했어! 너도 오른쪽 나무는 이 색연필을 써!' 아이들끼리 자기 작품을 가져다 친구 작품과 이리저리 맞춰보기도 한다. 괜히 흐뭇하다.

체육 시간엔 열심히 하다 넘어져 훌쩍이는 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교실로 달려와 누가 무엇을 하다가 운다며 나에게 알린다. '그럼 너희가 친구 옆에 가서 있어 줘.' 속삭인다. 그러자 정말로 옆에서 가만히 있어 주는 아이, 넘어져서 안 아픈지 물어봐 주는 아이, 넘어져도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아이, 우는 친구를 웃겨 보겠다며 개그를 서슴지 않는 아이가 한데 엉켜 부산스럽다. 그래도 예쁘다.

작년에는 인성교육에 집중해보겠다며 아이들과 도덕 공책을 펼쳤다. '이번 주에는 끈기의 의미를 배워보자.' 아는 것은 곧 실행할 수 있을 거라는, 소크라테스식 활동을 한 것이다. 올해는 도덕 공책을 펼치지도, 협동이나 배려의 '의미'를 배우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어딘가 성장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왜 그동안 배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교실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미소 짓게 되는 순간은 꽤 소박하다. '유 캔 두 잇'을 외치는 목소리, 옹기종기 모여 색연필을 고르는 진지한 얼굴, 속상한 친구 옆에 둘러앉아 나름대로 건네는 최선의 위로. 내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이게 바로 아이들이 가진 샘물이구나.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기쁨은 이미 교실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멋진 작품을 완성해보자는 나의 말 한마디에서, 실수하는 아이를 기다려주자는 나의 작은 행동에서 시작됐다. 아마 아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덕목을 실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서 배려와 협동과 사랑을 발견하는 나는 충분히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사색의 그물에 붙잡혀 있을 뿐, 깨달음은 늘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걸 깨우친 싯다르타가 생각난다. 따뜻한 배움은 처음부터 여기에, 우리 교실에, 나에게, 아이들에게 있었다. 내가 올해 발견한 예쁜 샘물에서, 언젠가 아이들도 시원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여지민 온양천도초등학교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아산시 송악면, "가을꽃 향기 만끽하세요"
  2. 축구부 학부모에게 3천만원 편취한 대학 전 감독 실형
  3. 숙취운전 통근버스가 화물차 추돌… 10명 다쳐
  4. 베이스볼드림파크 공정율 64프로…‘내년에 만나요’
  5. 응급실 가동률 충남대병원 32%·충북대병원 18%
  1. '문 연 병원·약국은요?' 추석연휴 119상황실 문의전화 쇄도
  2. 대전 학생들 전국 과학대회서 두각… 노벨과학 꿈키움 프로젝트 효과 톡톡
  3. 귀경 차량들로 붐비는 고속도로
  4. '美 빅컷' 지역 수출기업들 환영 분위기 속 '한은 결정' 예의주시
  5. 추석 연휴 끝…‘다시 일상으로’

헤드라인 뉴스


폭염에 용존산소량 미달?… 대전천 물고기 1600마리 폐사

폭염에 용존산소량 미달?… 대전천 물고기 1600마리 폐사

대덕구 오정동 대전천 일대에서 물고기 최소 1600마리가 집단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해 보건당국이 조사에 돌입했다. 19일 대전시에 따르면, 대전천이 유등천에 합류하는 지점인 오정동 삼천교 구간부터 현암교까지 대전천 1.8㎞ 구간에서 물고기 폐사체가 무더기로 떠올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날 오전 10시께 현장에 가보니 물고기들은 하얀 배를 수면 위에 드러낸 채 하천에 떠다니거나 수풀에 걸린 채 죽어 있었다. 아침에 산책하던 시민들이 발견해 보건당국에 신고된 것으로 하천 일부 구간에서는 탁한 색을 띠며 거품이 흩어지지 않고 뭉쳐서 떠..

현실감 떨어지는 공공임대주택…10평 이하 절반이 `공실`
현실감 떨어지는 공공임대주택…10평 이하 절반이 '공실'

공공임대주택이 실거주자들의 주택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공실 중 절반은 전용 31㎡(약 9.4평) 이하의 소형평수인 것으로 조사돼 현실적인 주택 수요에 맞게 면적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충남의 공가 비율은 전국에서도 가장 높은 것으로 집계됐고, 대전과 세종, 충북의 공가율도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 1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복기왕 의원(충남 아산시갑)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제출받은 'LH 임대주택 공가 주택수 및 공가율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4년 8월 기준 L..

국내 유일 특수영상 특화 시상식 `대전특수영상영화제` 팡파르
국내 유일 특수영상 특화 시상식 '대전특수영상영화제' 팡파르

과학기술과 영상산업이 결합한 국내 유일의 특수영상 특화 시상식인 '대전 특수영상영화제(Daejeon Special FX Festival)'가 9월 20일부터 9월 22일까지 카이스트 및 원도심 일원에서 개최된다. 대전시와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이 주최·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영화진위원회가 후원하는 이번 영화제는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와 드라마 중 우수한 특수영상 작품을 선정하고 제작에 기여한 아티스트들과 배우를 시상하는 행사로 2019년부터 개최된 대전 비주얼아트테크 어워즈를 지난해 대전특수영상영화제로 확대 개편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베이스볼드림파크 공정율 64프로…‘내년에 만나요’ 베이스볼드림파크 공정율 64프로…‘내년에 만나요’

  • 독감 무료 접종 내일부터 시작…‘백신 점검 완료’ 독감 무료 접종 내일부터 시작…‘백신 점검 완료’

  • 귀경 차량들로 붐비는 고속도로 귀경 차량들로 붐비는 고속도로

  • 추석이 지나도 계속된 폭염 추석이 지나도 계속된 폭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