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의 기억: 백발이 된 참전 용사들
2. 오늘의 현실: 열악한 처우에 놓인 호국 영웅들
3. 내일의 과제: 보훈부 승격, 지원정책 변화는?
양철순(94) 6·25 참전용사, 양철순 어르신은 중도일보와 만나 열악한 처우에 놓인 참전 용사들의 처우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진= 김지윤 기자) |
중도일보와 만난 6·25 참전용사 양철순(94·대전 대덕구) 어르신은 국가유공자의 열악한 처우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양철순 어르신은 1952년 12월 23살 나이에 입대했다. 훈련소에 있을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징집자들을 대상으로 UN군을 도울 한국 군인을 찾았는데, 서울 성동고등학교를 나와 알파벳을 안다는 이유로 영국군, 호주군 등 16개국으로 구성된 제1 영연방사단에 배속됐다.
그는 입대 직후 전쟁터로 바로 투입된 1952년 12월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양 씨는 "여기저기 폭탄이 귀가 찢어질 듯 '쾅, 쾅' 터졌다. 너무 무서웠다"라며 "두려움에 손은 떨리고 저 멀리서 총알은 날아오고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고 그 당시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양 씨는 전투 도중 큰 부상을 입었다. 전투 중 터진 폭탄 파편에 맞아 오른쪽 어깨를 심하게 다쳐 수술을 해야 했다. 그는 "살면서 겪어 본 것 중에 가장 고통스럽고 아팠다. 6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라며 "이후 육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했다. 아파도 어떻게 하냐, 사람이 부족해서 한 명이 귀한 상황인데"라고 설명했다.
전쟁 당시 한국의 많은 청년은 소중한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 대가는 침울하다. 양 씨는 6·25참전유공자회 대전시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동료들의 열악한 처우에 허탈감을 느끼곤 한다.
그는 "생활이 어려운 분이 많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고령에 전쟁 후유증으로 인한 질병까지, 그들로썬 국가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라며 "턱없이 적은 지원 금액에 다들 재정적 문제를 겪고 있는데 처우는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남은 인생 존엄한 삶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라고 전했다.
대덕구 6·25참전유공자회 사무실에 모여 있는 참전 용사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모여 점심을 함께 먹으며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곤 한다. (사진=김지윤 기자) |
또 다른 참전 용사인 김경식(가명·대전 유성구) 씨는 가족 없이 정부와 지자체의 적은 지원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1952년 3월 학도병으로 참전한 후 큰 부상을 입고 왼쪽 손을 심하게 다쳐 일할 수도 없어 매달 받는 49만 원의 보조금에 의지하고 있다.
김 씨는 "돈이 부족해 하루 한 끼만 먹을 때도 있다. 오늘도 전날에 구청에서 받은 빵 하나를 먹고 왔다"라며 "이러려고 나라를 위해 싸운 게 아닌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나라를 싸운 우리는 대체 누가 돕는 것이냐"고 한탄했다.
김지윤 기자 wldbs120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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