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정치도 상품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할 때다. 그동안 충청 정치는 변방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영호남 패권에 밀려 대권을 잡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균형을 잡았고 때론 적극적인 정치 행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회주의라는 비판도 따른다. 하지만 견제와 균형, 조율로 대표되는 충청 정치는 작금의 정치 현실에 필요한 가치다. 하나의 상품이자 브랜드로서 충청 정치를 풀어본다. <편집자 주>
이미지=이은지 기자 |
충청의 정치를 말하자면 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충남 부여 출생인 그는 30년 넘게 현대 정치사를 풍미한 '3김(金)시대'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현대정치사의 굵직한 사건 뒤엔 모두 김 전 총리가 있었다. 그의 삶은 영욕을 맛본 풍운(風雲), 그 자체였다. 다만 그는 일인자에 오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때문에 '만년 2인자'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JP는 반평생 넘게 권력 중심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리를 쫓으면서도 명분을 잃지 않는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동적인 현대사에서 살아남으며 다양한 정치 변신에 성공했다. 실리를 쫓되, 명분을 따르는 JP의 정치는 충청 정치의 본류이자,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중재와 조율, 견제와 균형의 능력은 하나의 기술이었다.
# 결국 JP의 정치는 기회주의?
물론 JP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새로 탄생한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실권을 잡았다. 조국 민주화에 애쓴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는 시작부터 다른 행보다.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변신을 거듭해 정치생명을 연장한 것도 사실이다. 이를 놓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순응했을 뿐이라는 기회주의의 표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JP의 결정과 선택은 위기의 순간마다 정치사를 바로잡았다. 'DJP' 연합으로 헌정사상 평화적인 첫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제3지대에 머물며 중재와 조율로 첨예하게 대립한 여야관계를 풀었다.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 필요한 건 충청의 실용 정치다.
# 자민련과 함께한 충청 정치의 전성기.
충청 정치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성장과 함께 전성기를 맞는다. 1회 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예고한 자민련은 15대 총선에서 충청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충북에서도 과반 의석 획득에 성공해 충청 전체로 세력을 넓힌다. 김대중 정권 탄생 직후 치러진 2회 지방선거에서도 국민회의와의 단일화로 대승을 거둔다. 물론 충청 지역당이란 비판을 피할 순 없다. 그러나 이 시기 자민련은 제3지대 정당으로서 존재감을 각인시켰고 중앙 정치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거대양당 체제가 굳어진 지금과는 다른 정치 현실이다. 지금도 다당제가 양당제에 비해 정치 불안정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러나 자민련은 일찍이 양당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통해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 JP와 자민련 퇴장에도 이어진 충청 정치.
JP가 17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자민련은 급속히 무너졌다. 그럼에도 충청 정치는 자민련의 후신 정당과 지역 정치인들의 노력으로 명맥을 잇는다. 비록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을 끝으로 지역 정당은 사라졌으나, 활동 기간 창조한국당과 교섭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누리는 등 정치력을 발휘했다. 물론 1인 중심으로 운영된 당의 구조와 불분명했던 이념 정체성은 한계로 꼽힌다. 지역 정치 구도가 보수와 진보 이념에 기반을 둔 거대양당으로 재편된 이후에도 충청 정치는 성장한다. 지역 정치인들은 각자 속한 정당에서 당내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다. 이 과정은 영호남 패권정치에 가린 충청이 정치 변방에서 벗어나겠다는 치열한 투쟁과도 같았다.
# 견제와 균형, 조율의 가치는 여전.
지역 인사들은 치열한 경쟁의 중앙 무대에서 충청 정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단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강창희 의원은 19대 전반기,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21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내면서 탁월한 중재 능력을 보여줬다. 고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짜장면 협상’으로 막힌 정국을 자주 풀었다. 다른 인사들도 지금까지 당 최고위원과 정책위의장, 상임위원회 간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멍청도'라는 비아냥과 달리 충청의 높은 단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 충청 정치는 계속해서 발전 중.
기회주의적 정치란 비판과는 다르게 충청의 도전은 그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도 특성이다. 우선 매번 무위에 그친 대권을 향한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대권을 쥐겠다는 권력욕이 아니다. 그간 이어온 영호남 패권정치의 종말을 고하겠다는 과감한 도전이다. 최근엔 양승조 전 충남지사가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으나, 대망론의 불씨를 살렸다. 충청의 정치력 강화를 꾀하는 시도도 잇따른다. 충남 아산 출신의 강훈식 의원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민주당 당권 도전에 나섰다. 국회의원에서 광역단체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도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각오다. 두 사람은 국회의원 시절 충청의 정치 위상 강화를 누구보다 부르짖던 인물들이다. 지역의 청년 정치 신인들이 꾸준히 수혈되고 있는 점도 충청 정치 발전에 긍정적인 신호다.
# 충청 정치, 제2의 전성기는 곧 온다.
처한 환경이 쉽진 않다. 옅어진 지역주의로 지역 차원의 압도적인 지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 지역을 하나로 묶을 리더 격의 정치인도 없다. 그러나 충청 정치는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지금의 정치는 기본 가치인 협상과 조율 과정이 사라진 채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만 존재한다. 정치영역의 문제가 사법부에서 다뤄지는 '정치의 사법화' 또한 일상화되고 있다. 지역갈등도 첨예하다. 상생을 꾀하기보단 우리부터 살고 보자는 새로운 지역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충청 정치가 가진 견제와 균형, 중재와 조율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실리를 쫓되 명분을 잃지 않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도 절실해 보인다. 이젠 충청이 정권 창출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떠나 정국 중심에서 균형을 잡을 때다. 충청 정치가 맞는 제2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부터다.
송익준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