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토량 47%, 터널 90% 대전~대구간 집중
공사중 대전육교·당재터널 무너짐 희생
개통 전 미리 달려보고 "굼벵이같은 열차"
착공 2년5개월만에 개통 77명 희생 앞세워
428㎞ 서울~부산 잇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절토량의 50%, 장대교의 60%, 터널의 90%가 몰려있을 정도로 대전~대구간 고속도로 개설은 어려움이 컸다. 그중에서 대전공구74.497㎞은 대전육교와 당재터널을 짓는 동안 무너짐 사고를 반복하며 근로자들의 피땀으로 완성한 한이 서린 곳이다. 1968년 2월 착공해 1970년 7월까지 2년 5개월의 경부선고속도로 건설역사를 찾아간다.
1969년 대전육교 건설모습과 충북 당재터널 굴착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및 한국도로공사) |
우리나라가 고속도로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도로기술 공무원들이 미국의 도로를 시찰하고 돌아온때부터였다. 당시 6.25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여념이 없던 때 한편으로는 고속도로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메이신(名神)고속도로가 1958년 착공되었고, 2개 노선의 고속도로가 계속 건설 중이라는 사실이 자극제가 되었다. 더욱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로 수송난이 예상보다 심각해지자 고속도로 건설을 진지하게 검토하게 되었고, 1965년 건설부는 서울~부산, 서울~인천, 서울~강릉, 대전~광주~여수간 1133㎞ 고속도로 건설 장기 계획안을 만들었다. 1967년 5월 서울~인천간 고속도로가 착공돼 시작을 알렸다. 1967년 4월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속도로 건설은 선거 공약으로 제시됐고, 그 후 10개월만에 착공했다.
서울대전간 고속도로 개통 기념식 모습. (사진=대전시 제공) |
충북 청원군에서 대전을 거쳐 충북 옥천군까지 대전공구 74.497㎞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에서 가장 어려운 공사 현장이었다. 전 고속도로의 성공 여부와 개통의 관건이 대전공구였다고 볼 수 있었다. 한국도로공사가 발행한 '조국 근대화의 길을 열다-경부고속도로 변천사'를 보면 대전~김천간 노선이 서울~대전과 대구~부산보다 늦게 결정된 것을 볼 수 있다. 고속도로의 시작점과 끝나는 지점에 노선계획을 1968년 1월과 같은해 4월 각각 결정하고도 대전~대구간 노선은 1968년 10월에서야 확정할 수 있을 정도다. '조국 근대화의 길을 열다'에 게재된 방동식 전 도로공사 충청지사장의 인터뷰에서도 악명 높은 대전공구의 건설환경이 잘 드러난다. 방 전 충청지사장은 "대전~대구간은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의 1/3에 불과하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47%, 절토량은 50%, 장대교는 60%,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다"라며 "얼마나 힘든 공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충북 옥천 당재터널은 공사 도중 13회에 걸처 낙반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다"라고 증언했다. 대전공구는 삼부, 대림, 아주, 현대건설이 최소 10㎞에서 최대 31.3㎞까지 시공을 맡았다.
▲눈꼬뜰새 없는 고속 추진
경부고속도로의 대전구간의 노선은 몇 가지 후보노선을 놓고 검토에 재검토가 이뤄지면서 혼선을 빚기도 했다. 천안에서 전동~조치원~대전으로 잇느냐 음성을 거쳐 대전으로 가느냐 또는 천안부터 기존 국도에 병행하느냐를 검토했다. 1968년 1월 중도일보는 "대전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획선이 정해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고속도로가 다행히 대덕군 동면쪽으로 뚫리게 되었다"라며 "건설부는 당초 1안을 철회하고 신탄진으로부터 판암동을 거쳐 대덕구 동면으로 타원형으로 돌아나가도록 노선을 바꿨고, 대전시는 동대전 개발에 획기적 계기를 기대한다"라고 소식을 전했다. 이틀 후 중도일보 지면에는 지상에 착륙한 헬기를 담은 사진과 함께 "공중 시찰한 박정희 대통령은 전의와 대전지방에 착륙해 김충환 충남도지사로부터 보고를 받고 귀경했다"라고 타전했다. 또 사흘 후 신문에서는 "고속도로 추진사업이 얼마나 고속적으로 이뤄지는지 충남도 관계자들은 눈코뜰새가 없다고 울쌍. 13일 밤 도로위치만 확정해 예고해주면서 15일까지 이에 부수되는 근대화 작업계획을 가져오라는 건설부 요구에 질색이라고"라는 단신이 게재됐다.
▲지역발전 기대와 소상공인 위기
서울과 부산을 대전에서 3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지역발전에 대한 기대와 함께 상공업계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 7월 중도일보는 완전개통 직전의 경부고속도로를 미리 달린 소감을 기사로 전했다.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진입해 대전육교에서 "아취형 콘크리트로 된 이 다리는 높이가 33m로 대전시내에는 이만한 높이의 건물이 없을 정도로 웅장하다"라고 표현했고, 막바지 공사 중인 당재터널에서는 "이 공사 중에 낙하사건이 16건에 10여 명의 의사자를 낸 현장"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마침 고속도로 옆을 달리는 열차에 대해 "굼벵이같이 느껴져 오히려 송구스러울 정도"라고 자동차 시대를 예고했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대전 소상공인에게도 변화 바람이 불었다. 서울과 시간격차가 좁혀져 중앙의 대생산 메이커들이 중간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유통에 개입함으로써 대전시내 영세상공인들이 위협을 받은 것. 또 기차 이용객이 감소하면서 서울행 여객은 50%대로 감소했고, 대구방면의 특급은 하루 80장 팔리던 것이 50장 미만으로 감소했다. 1970년 8월 중도일보는 "대메이커의 출장소가 지방 진출이 늘어나 대리점, 직매점, 총판 등이 30여 개소에 100여 명의 종사자가 일하고 있다"라며 "당장에는 중도매상의 몰락 현상마저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대전육교 붕괴사고를 전한 중도일보 1969년 8월 신문지면(사진 왼쪽)과 1969년 9월 당재터널 붕괴사고 기사. |
▲대전육교·당재터널 붕괴
1969년 8월 22일 낮 2시 5분께 당시 대덕군 비래리 대전육교 공사장에서 '아취 콘크리트'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계를 건설 중이던 아취가 20m 높이에서 떨어져 그 위에서 일하고 있던 36명의 인부 중 1명이 숨지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국내 처음으로 시도되는 아취형 공사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하는데 이날 사고는 제1교각과 제2교각 사이에 세워진 길이 50m의 강철아취가 24톤이나 되는 콘크리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떨어진 것이다. 중도일보는 사고를 전하는 기사를 통해 "인부들은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철근아취와 함께 떨어지면서 철근 등에 몸을 크게 다쳤다"라고 전했다.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당재터널(현 금강로 옥천터널)은 다른 지역의 터널보다 공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길을 열다-경부고속도로 변천사'에 따르면 당시 고속도로 터널을 건설할 때 현장에 도착할 진입도로가 없어 6㎞ 구간의 진입로를 1개월 이상 걸려 만들었는데, 비나 눈이 내리면 진입로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터널이 통과하는 지점이 계곡이며 양쪽 터널 입구는 물이 흐르는 지형이었다. 암석이 무른 탓에 상하행선 1222m를 뚫는 동안 13번이 무너지고 11명이 목숨을 잃은 끝에 준공됐다.
1969년 9월 11일자 중도일보는 이틀 전 당재터널에서 발생한 붕괴사고 소식을 전하며 "공사장은 3월초 착공해 현재 200m 공정을 보였는데 100m 중간지점 우측 천정 암반이 무너져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길이 428km, 동원 인력 890만명, 당시 국가예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429억 원이 투입돼,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에서 4시간 30분으로 줄였다. 금강휴게소 언덕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중 숨진 77명의 순직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당시의 희생을 말해주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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