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계룡버스 대전역~유성 첫 운행
16인승 마이크로버스에 도로는 비포장
노선변경 행정력 안 먹혀 회사가 임의대로
금남교 추락사고 등 대형 인명피해 초래도
1970년 파업 앞두고 공영제 개념 처음 소개
대전 초창기 시내버스는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마(馬)에 비유될 정도로 제도권 밖에 있었다. 운행노선을 결정하고 버스배차 간격이나 승·하차장을 버스회사가 임의로 정해 운영했으니 말이다. 승객이 적을 때는 중간에 하차시키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불편을 겪었고, 도심에 위치한 개별 정류장은 시민들 불편을 초래하기 일쑤였다. 버스가 시민의 발이 되는 과정을 찾아가본다.<편집자주>
대전시내버스 모습. (사진=대전시청 제공) |
대전에서 버스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우마차도 아니고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약속된 장소에서 승객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이동해 정해진 요금을 받는 행위는 신뢰와 기술, 도로여건, 이동수요가 모두 충족해야 가능한 일이다. 대전에서 버스운행 역사를 찾아보려면 우선 대전시내버스운송사업조합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대전 13개 시내버스회사의 결성체인 운송사업조합은 1952년 3월 계룡버스로부터 시내버스가 시작됐다고 기록했다. 1952년 3월 계룡버스가 설립돼 그해 8월부터 대전에서 유성을 오가는 버스를 운행한 게 시초였다. 1956년 10월 중도일보 지면에 버스와 관련해 이런 기사가 게재됐다. "대한여행사 소속 대전-유성간 운행되고 있는 시내버스(충남 영 616호)가 엔진고장으로 유성에서 대전까지 한 시간에 걸쳐 운행돼 승객에 불쾌감을 주어 명랑성을 상실한 바 있다"라며 "충남도 경찰은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버스의 운전수와 차장에게 제복을 착용하도록 했다"라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대전역을 출발해 대흥동과 충남도청을 거쳐 지금의 서대전사거리(당시 서대전삼거리)에서 유성방면으로 방향을 꺾어 유등천과 갑천을 건너 유성 온천지역에 도착하는 노선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6인승 마이크로버스
1950년대 엔진을 제작할 기술이 없던 당시, 시내버스는 미군 트럭을 개조해 사용하거나 신진공업사가 개발한 16인승 마이크로버스가 주로 활용됐다.
대전 시내 번화가에 정차한 채 승객을 기다리는 시내버스. (사진=대전시청 제공) |
버스가 달릴 도로도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다. 1970년 6월 진흙탕에 빠진 차량과 힘겹게 걸어가는 시민의 사진이 지면에 게재됐다. 1970년 7월 장마철 충남도내의 12개 버스노선이 노면불량과 교량파손으로 장기 결행 중이라고 보도했고, 앞서 6월에는 대전시내의 도로 17만500m 중 포장된 도로는 24.5%에 불과한 4만1700m뿐이라는 보도가 눈에 띈다.
▲뛰는 버스 뒤쫓는 행정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동차 시대가 개막했고, 인구증가에 힘입어 버스 이용객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운송질서를 확립하는 사법권이나 노선을 적정하게 배분하는 행정력은 미약했다. 1970년 1월 중도일보는 대전역에서 충남도청에 이르는 번화가에 여러 대의 시내버스가 정차한 사진을 게재하고 실상을 고발했다. 유성과 유천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들이 번화가 일대에 차를 세워두고 승객을 기다리며 수 시간씩 기다리는 바람에 주변 차량소통이 안 돼 혼란을 빚고 있다는 보도였다. 이때만해도 버스 운송사들이 손님이 있는 노선을 직접 정하고 버스를 운행해 수익을 거뒀다. 승객이 있음직한 노선에 여러 회사가 버스를 중복투입하면서 앞서가는 다른 회사의 버스를 추월해 손님을 먼저 태우려는 과속경쟁이 벌어졌다. 승객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출발한다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또 승객으로 가득찬 버스에서는 소매치기가 들끓었는데 운전사나 차장은 보복이 두려워 모른 체 하고 경찰은 증거를 대기 어렵다며 현행범 아니고서는 붙잡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도심에 혼잡을 줄이려 행정기관의 노선변경 조치도 이행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1970년 6월 보도를 보면 유성에서 대전으로 들어오는 버스는 당시 시청 앞을 통과해 대전고 앞을 경유해 대전역에 도착하도록 노선을 변경조치했으나 버스운송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종전대로 운행했고, 신탄진에서 들어오는 좌석버스 역시 중교를 건너 대흥동 시외버스주차장을 통과해 보문산으로 가도록 했으나 종전대로 시청 앞에서 목척교통을 운행하는 실정이어서 시민들이 어리둥절해한다는 보도가 있다.
▲희생 뒤따른 버스사고
사고로 인명피해도 적지 않았다. 하천과 철도가 발달한 대전과 충남에서는 버스의 하천 추락이나 기차 충돌로 인해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하곤 했다.
1958년 2월 금남교 추락사고 소식을 전한 중도일보 지면. |
1958년 2월 중도일보는 당시 공주군 장기면 금남면의 금강 중류에서 발생한 버스 추락사고를 여러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예산에서 오전 7시 출발해 대전을 향하던 버스가 오전 11시께 금남교를 건너던 버스가 다리 위 송아지를 피하려다 높이 19m에서 추락해 21명이 숨지고 7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67년 3월에는 대전 삼성동 건널목에서 시내버스가 기관차와 충돌해 버스승객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침 등교시간에 발생한 이 사고에 사상자는 대부분 충남농아학교와 대전대 학생이라고 전했다. 1970년 5월 서구 용문동 수침교 이는에서 대학생 2명이 등굣길 시내버스에 치여 중상을 입은 사고가 신문에 타전됐다. 사고 시내버스의 운전자는 무면허의 17세 최모 군이었고, 버스 조수였던 최 군은 아침에 운전사의 자택까지 버스를 가져가기 위해 무면허 운전전을 하다가 사고를 낸 것으로 조사됐다.
▲버스공영제 개념 구상
1970년 대전에서는 대규모 버스파업이 예고됐다. 그해 7월 보도를 보면 버스사업자들이 적자운영을 감내할 수 없다며 요금을 인상하겠다고 선언했다. 입석버스는 10원에서 15원으로 좌석버스는 15원에서 20원으로 올려받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요금인상을 승인해주지 않더라도 약속된 날부터 인상된 요금으로 운행하고 당국이 이를 단속할 경우 전면운휴, 즉 버스 운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1967년 10월 책정된 요금이 2년 8개월째 조정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이같은 버스요금 인상요구와 버스파업이 예고된 극한 상황에서 버스 공영화 개념이 처음 만들어졌다. 버스운행 중단이 예고된 날짜의 중도일보 지면을 보면 정부가 대전을 비롯해 전국 10대 도시에 지자체와 버스운송사가 참여하는 버스공사를 설립하고 운송사는 버스를 현물기탁하면 지자체는 자본금을 댄다는 구상이 게재됐다. 이 제도가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준공영제의 초창기 모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35년이 흐른 2005년 버스회사의 실제 운영수익이 부족할 경우 시가 재정으로 보완해주는 시내버스 준공영제가 시행됐다. 준공영제가 시행된 첫 날 풍경을 스케치한 중도일보 기사를 보면 "난생처음 버스 운전사가 승객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는 시민반응이 실렸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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