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에 없는 대전충남史] 도민 피와 살이 되어준 대전發 방송전파…라디오에서 TV까지

[검색에 없는 대전충남史] 도민 피와 살이 되어준 대전發 방송전파…라디오에서 TV까지

11. 지역방송, 세상을 밝히다

  • 승인 2021-08-11 19:49
  • 수정 2021-08-16 13:00
  • 신문게재 2021-08-12 11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컷-검색에

 

 

 

 

 

1943년 7월 15일 목동서 첫 방송전파 발사

일본어 위주 방송에서 한국어 이중방송으로

6.25때는 서울 대신 대전서 중앙방송 역할

1964년 문화방송 민영라디오 개막 다매체화

 

대전라디오방송국 라디오 송출
1959년 KBS대전방송국 전경. 대전 중구 목동에 안테나가 보인다.  (사진=충남도역사박물관 제공)
▲대전 목골에서 첫 방송전파=78년 전 대전 중구 목동 언덕바지(목골)에 세워진 작은 목조안테나에서 50W 출력의 전파가 대전과 충남 하늘에 처음 쏘아졌다. 대전역과 충남도청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논밭의 얕은 언덕이었던 목동은 전파를 쏘아 멀리 이르게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대전보다 시세가 작았던 이리 방송국이 500W 출력의 라디오방송을 하던 것에 비교하면 대전의 방송은 아주 미미한 출발이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라디오 전파를 포착해 도시를 찾아와 폭격하는 미군·영국군 공군기를 피하려 새롭게 개국하는 방송국에 출력을 최대한 낮출 수 밖에 없었다. 1943년 7월 15일 대전에서 처음 발사된 라디오 전파는 수상기에서 일본어가 흘러나오는 일본어방송이었고, 우리말을 전파에 담아 주민들에게 발신한 것은 그로부터 1년 지나고서다. 1944년 10월 45m짜리 목주 안테나를 추가 설치해 그해 11월 10일부터 300W 출력으로 증강된 안테나에서는 일본어 방송이, 기존 50W 출력의 안테나에서는 한국어방송을 발신하는 이중방송이 시작됐다. 이맘때인 1947년 기준 KBS대전 청취료를 납부하는 청취자는 8908명으로 전북(1만1232명), 전남(1만803명) 등에 비해 훨씬 적었다.

대전라디오방송국 송출(1959년)
1959년 대전방송국에서 직원들이 원고를 작성하고 있다. 테이블 원고표지에 '로컬뉴스철'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충남도역사박물관 제공)
당시 KBS대전방송국에 근무한 유병은 씨는 'KBS대전방송총국 60년사'에서 "한국어방송인 제2방송은 음악을 주로 내보냈고, 직원들을 거리로 내보내 보고들은 것을 뉴스 형식으로 보도했다"라고 방송풍경을 기록했다. 또 김석모 대전방송국장은 1959년 4월 21일과 22일자 중도일보 기고글 '방송문화의 개관'을 통해 "(일제시대)KBS가 당한 고난이란 열거될 수 없으리만치 눈물겨웠다"라며 "광복을 기해 방송이 우리손으로 운영되자 전파 그 자체가 우리의 피요 또한 우리의 살이되니 민족의 선구자적 역할과 입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일제의 손에서 벗어난 우리방송 의미를 해석했다. 1942년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일제는 국외방송을 청취할 수 없도록 단파수신기를 모두 압수했는데 미국의소리(VOA)나 중국 중경의 우리 임시정부에서 단파라디오로 전쟁 상황을 듣고 국내에 전한 조선방송협회(KBS 전신) 기술부 직원들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이때 출장소 형태로 운영 중이던 대전방송국 직원들도 다수 체포됐다. 단파방송 수신사건은 방송분야에서 이뤄진 독립운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쟁 중에 중앙방송국=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나흘 뒤인 6월 29일부터 대전방송국은 서울을 대신해 중앙방송국 역할을 18일간 수행했다. 'KBS대전방송총국 60년사'에 따르면 서울에서 피난 온 중앙방송국 직원들이 대전방송국에 주재하며 서울에서 북한인민군이 쏘아대는 50kW 출력의 전파에 맞서 50W를 가지고 전황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비밀리에 대전으로 피난온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은 서울을 사수할 것처럼 위장한 허위방송이 당시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대전방송국의 중계를 통해 서울 중앙방송에서 생방송으로 전파 쏘아졌다. 1950년 7월 15일 아침방송까지 마치고 직원들이 오전 9시 30분께 철수하면서 대전방송국은 한동안 공백기를 보낸다. 방송이 재개된 것은 1951년 2월 150W에서 시작해 적이 침략한 남한 방송국 중에서 가장 먼저 500W 출력으로 복구했다. 정부와 중앙방송국이 부산에 있는 상황에서 서울의 송신소가 불시에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대전 송신소가 키 스케이션이 될 수 있도록 가장 빠르게 출력 증강공사를 단행한 것이다. 이어 당시 문갑동 충남미유㈜ 대표 등 대전방송국 후원회와 UN군사령부 지원에 힘입어 같은 해 11월 10㎾출력시설을 완성했다. 이때 10㎾출력시설 준공식은 충남도청 의사당에서 개최될 정도로 의미가 있었는데, 대전방송국 아나운서 1호 천홍범 씨가 소장한 중도일보 1952년 11월 10일자에 '자유의 소리 HLKI대전방송국 10킬로와트 전력확충 시설 준공식 성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시설투자에 들어간 예산이 11억8711만원(圓)이었고, 이날 증강사업에 큰 도움을 준 미육군 보리스 중령과 성낙서 도지사에게 공로장을 전달했다"라고 기록했다. 또 같은 날자 중도일보 보도에서 출력증강 특별프로그램을 소개했는데, 저녁 ▲5:00 저녁음악 ▲5:15 방송예고와 음악 ▲5:30 항공병학교장 공군대령 김성태 기념사 ▲5:40 고아의 시간 ▲6:00 뉴스(중앙) ▲6:30 노래와 경음악 ▲7:00 합창과 독창(YWCA) ▲7:30 미국의소리 중계 ▲8:00 뉴스(중앙) ▲8:30 충남경찰국 취주악 ▲9:00 UN의 시간이다. 대부분 서울 중앙방송을 중계한 것이고, 로컬방송 시간에는 기관장의 공지사항을 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김석모 대전방송국장은 앞서 중도일보 기고를 통해 "1958년 7월 23일 30분간 서울과 대전을 잇는 2만m 방송에서 처음 보는 발전을 입증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1964년09월27일 대전문화방송 개국풍경
1964년 9월 대전문화방송(MBC) 개국 소식을 전한 지면보도.

▲민영방송시대 개막=대전문화방송은 대전 첫 민영방송이라는 기대 속에 1964년 9월 26일 호출부호 HLCQ 주파수 580㎑, 출력 1㎾로 중구 대흥동 495번지에서 개국했다. 지금의 중부경찰서 옆 대전신용보증재단 자리에 있던 옛 대한생명 4층 사옥 중 3~4층에 자리했다. 다만, 전파를 쏘는 송신소는 가장동 10-1번지에 124m 3각 철탑을 세워 전파를 발신함으로써 대전에 민영방송시대를 열었다. 당시 대전시 인구는 30만 명, 라디오 수상기는 1만5770대에 불과했다. 1964년 9월 중도일보 보도에 따르면 "가청구역은 대전시내를 중심으로 50㎞ 반경으로 조치원, 청주, 공주, 영동, 보은, 금산방면에 달한다"라며 "방송국원은 아나운서 4명, 기자 2명 등 25명이나 된다"라고 소개했다. 1965년 1월 당시 대전MBC 이영희 국장의 인터뷰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있어도 청각을 통해 자극해오는 싸이클이라는 요물에 현대인들은 부쩍 구미를 돋우기 시작했다"라고 라디오를 정의한 낯선 표현이 눈길을 끈다. 

 

당시 민영방송 개국에 거는 기대는 1964년 9월 27일 사설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제까지 국영방송만이 시민의 반려가 되었음에 대하여 이제 민영방송의 첫 케이스로서 지방의 특색을 살리고 풍속을 순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라고. '대전문화방송 30년사'는 개국 당시 시민들이 보인 호응에 대해 "행정관서의 비리나 사회 각 분야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지적, 시정을 촉구하는 투철한 감시기능을 수행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때 대전MBC 전파는 인접국인 중국방송에서 580㎑ 동일 주파수로 혼선을 일으켜 야간에는 청취범위가 대폭 축소됐는데 개국 10개월만에 주파수 580㎑에서 1110㎑로 변경했고, 산악지형에 맞지 않아 1971년 5월 이보다 낮은 760㎑로 바꿔 방송했다. 1967년 7월 10㎾ 출력증강을 계기로 대전시 일원에 불과했던 방송구역을 논산, 부여, 공주, 연기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1964년 10월 14일자 중도일보 보도를 보면, "라디오 청취혜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라디오를 소유하지 못한 많은 국민이 있는가하면, 라디오를 가지고도 방송을 듣지 못하는 지역도 있다"라며 누구도 전파의 혜택에서 소외되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라디오가 없는 마을에는 스피커를 설치해 방송을 틀어줬는데 이러한 유선방송사업이 성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이맘때 지면에 여러차례 등장한다.

▲TV&다매체 시대로=TV방송 시대는 1966년 식장산에 중계소가 설치되면서 그해 5월 16일 저녁 정규방송을 시작으로 대전KBS TV전파가 발사됐다. 5월 18일자 중도일보 지면에는 대전에 처음 TV방송전파가 쏘아진 날의 풍경이 다소 익살스럽게 묘사됐다. "텔레비전을 이용해 손님을 끌려는 다방 등의 접객업소에서는 성급하게 설비를 갖췄으나 공짜로 들어와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얌체 손님때문에 오히려 울상이 되었다"고 전하고, "안테나 조작법이며 기타 스위치 사용법을 중계소에 물어오는 등 가벼운 소동도 있었다"고도 전했다. 대전MBC도 1971년 1월 텔레비전방송 허가를 받아 정동 일락빌딩에 연주소를 두고 옥상에 안테나를 세움으로써 그해 4월 24일 호출부호 HLKZ 영상출력 2㎾, 음성출력 500W로 충청권 전역을 대상으로 TV전파를 발신했다. 

 

사건사고를 같은 시간대에 여러 지역으로 전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TV는 최첨단으로 여겨졌고, 보통 서울소식은 구전이나 신문지면을 통해 이틀 뒤에나 대전에 전해졌다는 점에서 방송은 대전시민을 놀라게하기에 충분했다. 1987년 6.29선언의 영향으로 민영방송 설립을 가능케하는 새 방송법이 제정되고 1994년 대전 TJB방송을 비롯해 4개 지역민방이 허가돼 1995년 5월 14일 동구 효동 122-1번지에서 개국했다. 호출부호 HLDF-TV, 주파수 521㎒, 영상출력 10㎾ 규모였다. 꾸준히 성장해 1998년 3월 주파수 95.7㎒, 출력 5㎾의 TJB POWER FM을 개국, TV와 라디오 방송을 겸업하는 종합전파 매체로 자리를 잡았다. 대전극동방송은 1989년 12월 주파수 FM 93.3㎒, 호출부호 HLAD, 출력 3㎾ 규모로 첫 지역전파를 발신하고, 기독교대전방송도 같은해 12월 호출부호 HLDX, 주파수 91.7㎒, 출력5㎾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이재명, '수도권 몰빵 폐해' 종식 선언...세종시 밑그림은
  2. [대선 D-3] 이재명 충청서 주말 총력전 역대선거 '캐스팅 보터'지역 방문
  3. 세계평화여성연합 천안시지부, 천안 마틴공원서 호국보훈의 달 기념 봉사활동 실시
  4. 천안법원, 장애인주차표지 위조·행사한 50대 남성 '징역형'
  5. 천안법원, 월세 피해의식에 불 지르려 한 60대 남성 '징역 1년 6월'
  1. 현대건설, 천안지역 폭염 취약가구 위해 후원금 기탁
  2. 천안시 서북구보건소, K-컬처박람회 '안심 방역' 총력
  3. 한기대, 창업 선배가 후배들에 전하는 '진솔 멘토링' 호응
  4. 창원시, 버스파업 3일차 호소문 발표
  5. 통합과 혁신 나선 지역 국립대… 체질 개선 '안간힘'

헤드라인 뉴스


21대 대선 하루 앞… 소중한 한 표 충청의 선택은 누구에게?

21대 대선 하루 앞… 소중한 한 표 충청의 선택은 누구에게?

대전·충청은 물론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할 21대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대선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지는 궐위 선거로, 4월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과 동시에 열린 초단기 대선 레이스가 지금까지 숨 가쁘게 이어졌다. 60일의 짧은 기간 동안 각 정당과 후보들은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전통적 캐스팅보터 지역이자, 역대 선거마다 승패를 결정지은 금강벨트 표심을 초반부터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 결과, 충청의 숙원인 행정수도 완성을 비롯한 첨단산업벨트 구축과 주요 공공기관 이전,..

대선 후보들 과학수도 대전 약속했다
대선 후보들 과학수도 대전 약속했다

6월 3일, 21대 대통령 선거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충청 발전을 위한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후보들은 물론 국민 대통합과 국가균형발전, 미래산업 발전을 위한 공약은 물론 충청지역 발전을 위한 공약도 쏟아냈다. 유권자들은 연설이나 퍼포먼스를 잘하는 후보도 좋지만, 공약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이행할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충청에 도움이 된다. 중도일보는 충청인들의 선택을 돕고자 제 21대 대통령 선거 후보들이 제시한 충청권 4개 시도 주요 공약을 분석했다. <편집자..

식품·외식 물가 껑충에 서민 부담 늘어간다
식품·외식 물가 껑충에 서민 부담 늘어간다

물가 상승으로 소비자가 느끼는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다. 물가가 오른 데는 식품기업과 외식업계 등의 가격 인상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급격한 물가 상승에 당분간 서민들의 부담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일 업계에 따르면 2024년 정부의 압박에 가격 인상을 자제해오던 식품업체들은 계엄 사태 이후 이어진 탄핵 정국의 혼란기에 제품 가격을 줄줄이 올렸다. 가격 인상 사례는 지난 1월과 2월에 이어 3월 이후 부쩍 늘었고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동서식품은 대선 나흘 전인 전날 국내 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제21대 대선 개표 준비 ‘꼼꼼하게’ 제21대 대선 개표 준비 ‘꼼꼼하게’

  • ‘미리 참배왔어요’ ‘미리 참배왔어요’

  • 사전투표함 보관 ‘24시간 철저하게’ 사전투표함 보관 ‘24시간 철저하게’

  • 사전투표 행렬 사전투표 행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