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신념 등 저마다 이유는 달라..."공동체 통해 의지하며 더 나은 삶 꿈꿔"
모임 통해 가치와 정보 공유....비건은 '유난한 음식이 아냐'
음식은 국가의 문화이자, 지역의 문화, 그리고 한 가정의 문화다. 여행을 가서 그 나라의, 그 고장의 대표 음식을 맛보는 것도 그 지역의 정서와 역사, 정체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쌀밥이, 쇠고기가, 유기농 음식이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받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채식만 먹는, 일명 비건족이 화두다. 동물에게서 얻은 식품을 일절 거부하는 비건(Vegun)은 기후 위기, 동물권에 대한 박애주의 등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밥심'이라는 말이, 여전히 가족행사로 '고깃집'을 선택하는 우리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는 '유난한 사람'이다.
고기를 거부하는 딸에게 폭력적으로 음식을 집어넣는 아버지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소설 '채식주의자'처럼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채식으로 산다는 것은 '유난스럽다'라는 눈총을 감내해야 하는 신념이 필요하다. 그래도, 왜 그들은 채식을 택하는 것일까. 건강 때문일까? 동물에 대한 박애주의 때문일까? 단순히 트렌드 때문일까?
중도일보는 자신만의 먹거리 신념을 지켜가는 '유난한' 사람들을 조명해 먹거리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첫 번째는 신념을 위해, 필요에 의해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채식주의자들이 있었다. <편집자주>. 해당 기사는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갈마동 독립서점 즐거운 커피에서 제공한 시금치 파스타. 아래쪽에 있는 파스타는 비건옵션이라 치즈가 없다./이유나 기자 |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
# 취업준비생 A씨는 환경을 위해 채식을 선택했다. 그는 육식을 했을 때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채식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익숙해진 고기의 유혹을 지나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로 칭하기를 부끄러워하지만 가능하면 채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 갈마동 비건 빵집인 비건바닐라에서 일하는 무루씨는 동물권을 위해 비건을 결심했다. 사육사를 꿈꿨던 무루씨는 동물원에 대해 공부하다가 동물권에 관심 갖게 됐다. 그는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을 알게 돼 고등학교 때부터 채식을 시작해 지금 4년째다. 육식이 기본인 급식을 거부한 그는 점심을 굶거나 집에서 가져온 떡이나 감자칩으로 떼우는 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내 자유가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누군가의 고통을 수반한다면 다시 성찰돼야 한다"며 "동물권에 대한 인식은 아직 반려동물에 머물러있지만 먹히기 위해 갇혀있고 고통받는 동물들도 생각해야 한다"고 전했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채식 도시락을 싸왔다. 된장국, 비트피클, 나물, 김치볶음밥, 쌈, 비건 육포./이유나 기자 |
지난 21일. 대전 무수동 치유의 숲에는 다소 '유난한' 사람들의 '유난한' 모임이 열렸다. 각자 도시락을 싸들고 온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푸르고 빨갛고 노란 빛깔의 다양한 음식물을 펼쳤다. 서로의 음식을 나눠 먹은 후 이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도시락통을 다시 가지고 헤어졌다. 비긴앤비건 주최로 열린 바로 도시락 소풍이다. 산림치유지도사인 손을영씨가 무수동 치유의 숲으로 조은우씨를 초대해 만나게 된 것이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작은 도시락 소풍에는 3명의 사람이 모여 각자의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대체육과 라이스페이퍼를 이용한 쌈, 비건 육포, 김치볶음밥,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는 강황가루로 만든 밥 등 평소에 보지 못했던 창의적인 음식에 참석자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조 씨는 "비건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소풍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변에 채식주의자가 적기 때문이다.
2020 비긴 앤 비건 참여자들이 만든 얼렁뚱땅 채식 레시피 책자에 두유크림버섯파스타 만드는 법이 소개돼있다./이유나 기자 |
지역 공동체 한밭레츠(대덕구 법동), 제로웨이스샵·카페 자양분(동구 자양동), 비건 빵집인 비건 바닐라(서구 월평동)가 거점이다. 충청 지역의 또 다른 커뮤니티인 '충청 고 비건 아삭아삭'도 비건을 실천하는 90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지역에서 비건을 실천하는 사람이 적은 탓에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이들은 끈끈한 관계를 이어간다. 무엇보다 이 커뮤니티의 특징은 위계질서가 없다. '종, 성별, 성적지향, 나이, 종교 등에 따라 상대를 정의하거나 위계를 만들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맺습니다' 약속문처럼 편견 없이 서로를 대한다. 채식을 선택했지만,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단순히 식단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자는 거대 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채식을 통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 안에는 급격한 기후 위기가 없어야 하고, 인간처럼 동물들의 생명도 존중되는 동물권, 어떤 식단이든 서로에 대한 편견이 없는 차별 없는 사회다. 그래서 이들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이 그렇게 '유난한 것'은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가급적이면 채식을 먹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아침 한 끼만으로 채식으로 바꿀 수 있다.
비건 바닐라에서 겨울에 팔았던 딸기 타르와 딸기 초코 케이크. 우유·계란·버터를 사용하지 않은 비건 디저트다./이유나 기자 |
채식을 선언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국내 채식 인구는 지난해 기준 약 15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2008년에는 약 15만 명이었는데, 12년 만에 무려 10배나 증가했다. 지역에서는 브런치카페 어플레져, 채식뷔페 러빙헛 등의 식당이 채식주의를 표방한다.
아삭아삭 커뮤니티를 처음 만든 황진아씨는 "비건 페스티벌이 서울에서 열리는데, 대전에서 비건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소망이 있다"고 포부를 전했다. 채식보다 큰 개념인 비건은 식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라며 "서울로 강의와 모임에 참여했지만 한계를 느껴 지역에서 연대하고 지지할 공동체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유나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