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 역사에서 사라진 충청은행. 처음 문을 연 1968년부터 1998년까지 이룩한 112개 은행지점은 6월 29일부터 문을 닫았고, 주주 1만1069명의 주식은 가치를 상실했다. 충청은행 30년사에 마지막 페이지가 슬픈 결말이어서인지 책의 첫 장은 어떻게 시작하는지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경제 규모가 더 컸던 인천과 광주보다 앞서 대전에서 시민들의 힘으로 지방은행을 출범한 역사가 담겨 있다. 53년 전 척박한 충청권에 은행에 싹을 어떻게 틔웠을까.
1976년 대전 원동 충청은행 본사건물. (사진=대전시청 제공) |
1967년 3월 11일 은행동에 있는 한국은행 대전지점에 지역 상공인과 경제인 20여 명이 하나의 결의를 맺는다. 우리가 축적한 재원을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 언제나 자금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우리 손으로 만든 금융기관이 필요하고, 은행 설립의 모든 진용을 갖추기로 했다. 1967년 3월 14일 자 중도일보는 이날 회의를 '대전은행 설립 추진위원회' 발족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기사는 "대전에 모든 은행이 본점을 서울에 두고 감독에 얽매여 대전 대출액은 소수에 그치고 특수층 이용시설은 될지언정 일반 시민이나 상공인들의 이용기관은 되지 못한다"라고 지방은행 필요성을 역설했다. 같은 달 사설에서는 "대전시의 금융 메카니즘은 본점 소재지인 서울의 주주 특수층의 자금 젖줄에 지나지 못한다"라며 "대전에 총 예금고는 20억 원에 달하지만 그중에서 대전지방민에게 대출된 것은 소수인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말했다.
1967년 한국은행 대전지점 회의실에서 개최된 충청은행 발기인 총회. (사진=충청은행30년사) |
▲이삿짐 여러 번 설립추진위
당시 충남도 내 예금 규모가 전국 예금액 중 3.2%에 불과해 지역기업의 자금조달은 어렵고 이는 다시 지역 저축의 둔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유발했다. 장롱 속에 보관된 현금을 모으고 이렇게 조달된 자금을 지역에 재투자할 지방은행 설립이 반드시 요구됐다. 1975년 3월 25일 한국은행 대전지점에서 개최한 발기인 총회는 수권자본금 4억 원, 납입 자본금 2억 원 규모로 충청은행을 창립하되 발기인 1인당 500만 원씩 출자해 1억 2500만 원을 인수하고 나머지 7500만 원은 일반 공모를 통해 자본을 모으기로 했다. 이웅렬 중도일보 사장이 은행 발기인 대표를 맡고 문갑동 대전상공회의소 회장은 고문, 박호달 전 대전시외버스공용터미널 사장은 총무, 남선기공을 창업한 송중만 사장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충청은행 창구에서 시민들이 은행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대전시청 제공) |
이웅렬 중도일보 사장은 충청은행 설립 25주년 회고의 글에서 "은행하면 특수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고루한 냄새를 풍겨온 것도 사실"이라며 "청약금 모집이 지지부진해 결국 한 해를 넘겼고 은행감독관을 찾아가 3개월 연기 또 연기했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 지방은행 설립은 불가능한 것인가 생각되기도 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충북과 서울을 연대한 추진위
납입자본금을 1억 5000만 원으로 재조정하고 주주 모집에 최선을 다해 뛰어도 대전과 충남에서 마련한 돈은 8000만 원을 넘어서지 못했고 7000만 원이 부족했다. 설립추진위는 충남뿐만 아니라 충북의 상공인과 서울에 있는 충남·북 출신 실업인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67년 12월 16일 충청은행 설립에 힘을 보탠 재경 충남·북 출신 인사들과 서울에서 간담회가 개최되고 지지부진한 설립과정에 전환점을 이뤘다. 김종희 한국화약 대표, 최준문 동아건설산업 회장, 조정구 삼부토건 대표이사, 김제원 신진자동차 회장 등이 참석했고, 김종필 당시 공화당 당의장과 길재호 국회의원, 공주 출신의 김세련 한국은행 총재가 동석해 지방은행 설립을 위한 의견 조율이 이뤄졌다. 중도일보 1967년 12월 20일 자 보도를 보면 "7000만 원의 주금을 약속함으로써 그 주식형성은 완전히 매듭을 보았다"라며 기업별 주식 인수금액을 명시했다.
1967년 충청은행 설립 발기인 총회 관련 중도일보 기사. |
당시는 유천동과 도마동이 아직 농경지로 남아 있던 때로 논값이 평당 4~500원 정도여서 충청은행 설립을 위한 액면가 1000원의 주식 1주를 매수하려면 논 두 평을 팔아야 마련할 수 있었다. 설립 자본금 1억5000만 원은 당시 큰 금액이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호달 전 대전개발위원장은 충청은행 30년사에 "한국은행 김세련 총재와 충남북 출신 재경 실업계 인사들의 호응을 얻어 주금 모집에 성취했다"라며 "창립총회 며칠을 앞두고 주식 청약자 수 명이 돌연 청약을 취소하자 비상수단으로 대전상공회의소 상임위원회를 소집해 각자 분담해 난관을 극복했다"라고 증언했다. 1968년 2월 드디어 창립총회가 대전상공회의소에서 개최돼 이웅렬 중도일보 사장을 충청은행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은행동에 본점 사옥을 마련했으며, 3월 2일 금융통화운영위로부터 은행 설립 본인가를 획득했다.
▲전액 지역에 재투자 은행 출범
대통령 연두교서가 발표된 후 15개월만인 1968년 4월 22일 충청은행은 자본금 1억 5000만 원, 임직원 48명으로 구성된 본점을 개업했다. 대전역 앞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옆 당시 동방생명보험이 입주한 동방빌딩이었다. 대통령이 연구교서에서 후보지로 언급한 대구은행과 부산은행이 충청은행보다 반년 앞서 설립됐고, 인구나 도시면적, 경제력에서 충남지역보다 발전한 인천과 광주보다 앞서 개업할 수 있었다. 충청은행은 개업 첫날 목표액 2억 원을 훌쩍 넘겨 2억7000만 원 예금을 확보했는데, 주주의 2/3 이상이 대전지역 상공인이고 자금운용에서 전액을 지역에 재투자해 지역경제 개발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금융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중도일보 1968년 4월 23일 보도는 "4월 22일 8시 12분, 이 순간을 위해 무디고 지루한 1년여의 세월이 소비돼야 했다. 이날 충청은행이 이 고장의 경제발전을 위해 금융의 대중화를 기약하면서 시내 중동 92번지에서 힘차게 첫발을 내딛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창립 당시 3억 원에 납입자본금 1억5000만 원으로 시작해 1997년 말 기준 수권자본금은 1조 원, 납입자본금 1185억 원에 이르는 대형은행으로 성장했다. 주식을 보유한 이는 1968년 1월 61명에서 1997년 1만1069명에 달했고, 임직원은 48명에서 1734명으로 늘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1998년 6월 충청은행 등 5개 은행에 구조조정을 발표하고 업무 정지을 선언함으로써 충청은행은 30년 역사를 마치고 하나은행에 인수됐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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