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지정에 앞서 67년부터 추진위 구성
충남도·건설부부·유솜 찾아가 필요성 설득
"사교지대" 폄하엔 "부끄러운 망언" 반박
620사업과 통신탑으로 도민들 제한 여전
계룡산은 1968년 국립공원 지정에서 제외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 계룡산이 무당 등의 사교지대에 불과하고 국립공원 지정을 서두르는 것은 정감록을 믿기 때문이 아니냐는 유력 국회의원의 폄하 때문이다. 지난 3년간 국립공원 지정을 준비한 충남도민들은 국회를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경주와 한려해상공원과 함께 국가가 가꾸고 보전할 공원으로 지정돼 지금껏 가꿔오고 있다. 22곳의 국립공원 중 면적에서는 21번째인 계룡산이 두 번째로 빠르게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지역에 관광자원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계룡산국립공원 모습. (사진=계룡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제공) |
▲도민들이 앞장선 국립공원화
계룡산 여러 봉우리 중 알봉이라는 곳에서 하늘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의 사진이 관련 기사와 함께 1961년 11월 중도일보 신문에 게재됐다. 절기상 소설(小雪)의 이른 추위에도 제전에는 주민 400여 명이 참석해 지켜봤고, 금강주류 및 서해안 개발이 여유롭게 추진되어 산업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바라는 고천문이 낭독됐다고 전했다. 이처럼 충청도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계룡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운동은 공원지정 훨씬 전부터 이뤄졌다. 1968년 12월 중도일보 보도를 보면 "1966년 6월 충남 도내 뜻 있는 인사들로 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중앙 요로에 10차에 걸쳐 건의해 그해 8월부터 충남도가 계획 자료조사가 이뤄졌다"고 기록했다.
1989년11월03일 중도일보 지면. |
1968년 발행된 충남도정백서에서도 "1967년 국립공원대상지의 기본조사를 하고 민간추진위원회의 호응을 받아 정부에 지정을 건의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정백서가 발행된 때는 국립공원에 지정되기 전이었다. 당시 계룡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는 충남도민과 대전시민 15명 남짓으로 구성돼 전방위 활약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원조기관이었던 유솜(USOM-K)의 한국기술책임자 스미스씨를 찾아가 계룡산개발비 지원을 요청했다. 1989년 11월 중도일보가 계룡산국립공원 지정 20주년에 맞춰 게재한 신문을 보면 "이웅렬 계룡산국립공원추진위원장은 유솜의 연간 운용자금이 2억5000만 달러 중에서 1억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국제원조 유솜 관계자와 건설부 등의 직원들이 계룡산을 찾아 현지시찰을 벌였다. |
이때 유솜의 스미스 씨와 건설부 관계자들이 계룡산을 찾아와 정상까지 올라 현장조사 한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1967년 5월에는 국립공원 지정에 필요한 사전절차의 일환으로 건설부와 국회 전문위원이 산을 찾아 현지조사를 벌였다. 4명의 합동조사반이 계룡산을 방문해 국립공원추진위원회와 대전관광협회, 산악회의 안내를 받아 명승지를 일일이 돌아봤고, 이때 건설부 국토계획과장은 "돌아본 결과 과연 충남도민들의 국립공원 지정 요청의 참뜻을 알겠다. 적극적으로 지정되도록 노력하겠다"라는 발언이 신문에 인용됐다.
▲사교지대 폄하을 반박하다
도민들의 요청과 충남도의 건의를 받아 건설부가 국회에 계룡산 국립공원 지정의 건을 1968년 상정했으나 뜻밖에 난관에 부딪힌다. 국립공원 지정 여부를 결정할 국회 국토건설계획심의회에서 야당의 수장인 어떤 국회의원이 계룡산을 신흥 종교집단의 미신의 산으로 취급하며 부정적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중도일보는 당시 보도를 통해 국회의원의 발언을 이렇게 인용했다. "사교가 들끓는 계룡산 일대를 내외관광객에게 전시해 사교의 추태를 드높일 셈인가"라거나 "국립공원 지정에 서두르는 것은 정감록을 믿기 때문인가"라고 말이다. 이에 나흘 뒤 사설을 통해 "몰지각한 국회의원이 있었던가 싶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 악의에 찬 망언을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할만한 입지요건이나 관광자원 등이 있느냐가 문제 되어야 할 것이지 정감록이니 사교가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더 나아가 국회의원에 반성을 촉구했다.
1968년 12월 1일 국립공원 지정을 결정한 운명의 날 계룡산국추진위원회는 100여 장의 종이 슬라이드를 가지고 상경해 심의회에 쉬는 시간마다 의원들을 설득했고, 계룡산을 놓고 4시간 논쟁 끝에 오후 7시께 지정을 이끌어 냈다. 계룡산국립공원사무소가 2008년 발행한 40주년 기념서에 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한 김병수 씨의 인터뷰가 게재됐다. 그는 "당시 지역 주민에게 '국립공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정도였고, 15명 남짓의 추진위원회는 국립공원을 향한 의지를 중앙정부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게 임무였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종교정화사업 300개 시설 퇴출
성원에 힘입어 국립공원에 지정됐으나 국민이 찾는 공원이 되기에는 기반시설이 크게 부족했다. 관리사무소는 1973년에서야 개소했고, 국립공단이 출범한 1987년까지 20년 동안 충남도가 계룡산에 공무원을 파견해 보존과 관리를 맡아야 했다. 신흥 종교집단은 산 중턱에 자신들의 건물을 짓고 길을 만드는 등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했고, 제사에 사용된 음식이 산속에 방치돼 악취와 벌레가 끼는 일이 다반사였다. 1989년 보도에서 국립공원 이전의 계룡산 모습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 과일 등으로 어지럽기 그지없었고, 바위 골짜기마다 촛불과 향으로 얼룩져 온통 촛농이 그득했다. 산골짜기는 울긋불긋한 깃발이 펄럭여 마치 국민학교 운동장을 방불케 했다"라고 묘사했다. 1976년부터 국립공원 내에 종교정화 사업이 시행돼 2년간 300여 채의 기도원이나 무속인 시설을 철거했다.
1967년 국립공원 지정에 앞서 합동조사단이 계룡산을 찾아 명승지를 둘러봤다. 중도일보 1967년 5월 지면. |
이때 교주들은 산림법 위반과 식품위생법 위반, 사기 등의 혐의로 입건됐고 신도와 민간인의 산 출입도 제한됐다. 또 동학사와 갑사 일원에 집단상 정비도 이뤄져 음식점과 여관 등을 산 아래로 이전시켰다. 반대로 "무속이 이 나라의 민중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반발도 작지 않았다. 계룡산에 국립공원 지정을 갈망했던 것은 유성온천과 연계해 관광자원으로서 개발되기를 바라는 기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8년 보도를 보면 전년도 통계를 인용해 "계룡산에 외국인 관광객이 연간 1만2900명이 방문하고 내국인은 113만 명에 달해 이곳에서 조달한 외화소득만도 25만9500달러에 달한다"라고 기록됐다.
▲620사업과 통신탑에 내준 숨결
1983년 620재개발 사업은 계룡산 일대에 정착한 주민과 신흥종교단체의 집단 이주를 초래한 국가 기밀시업이었다. 1989년 보도를 보면 620재개발사업은 신도안 내 암사·정장·부남리 등에 1080세대 40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곳에서 1983년 8월부터 1984년 6월까지 전개됐다. 3군 본부를 이전하기 위한 것으로 52개소의 신흥 종교집단도 이때 모두 옮겨지고 시설물은 모두 철거됐다.
이주하는 주민들에게는 세대 당 130만 원씩 특별지원금과 주택건립자금을 융자하거나 충남 당진군 송산면 간척지에 농경지를 우선 분양했다고 기록됐다. 또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에 통신 중계소가 설치된 역사도 앞서 '40주년 기념서'에 기록돼 있다. 발단은 해방 후 미군이 천황봉 능선 아래 치개봉에 안테나 형식의 군용 통신중계소를 세운 게 시작이었다.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안테나는 2년 후 치개봉에서 천황봉으로 이전됐고, 6.25전쟁 후 미군이 헬기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공사를 벌여 지금처럼 철탑 규모의 중계소에 이르게 된다. 국립공원에 지정되고 1972년에는 국방부가 통신장비 보관을 위해 천황봉 밑에 직경 3m에 길이 20m 규모의 암굴을 만들어 공원사무소에 발견됐고, 2000년께 환경단체의 반발을 의식해 통신탑 위치를 조정하고 암굴에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계룡산의 최고봉은 여전히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제한구역으로 남아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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