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홍도동공동묘지 이전사업 착수
1971년 화장장마처 철거돼 시민들 불편
신상리·상소동 취소 후 2전3기만에 준공
1만4천기 합장한 홍도총에 일본인 발길
공동묘지와 화장장을 마련하는 일은 대전이 도시로 성장하는데 한 번은 넘어야 할 성장통과 같았다. 대전시는 공동묘지를 '도시개발의 암적존재'라고 시정백서에 기록될 정도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고, 대체시설 없이 화장장을 철거하는 바람에 노상에서 화장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주민들이 충남도경찰국장을 도로상에 포위하고 대전시장이 헬기를 타고 급히 도착해 백기를 든 사건도 화장장 건설 과정에서 발생했다. 최근에는 재대전 일본인 후예들이 무연고 유해를 안장한 홍도총에 방문하는 것도 주목을 끈다.
1973년 대전 홍도동공동묘지 이전사업 현장. (사진=대전시청제공) |
▲대전 첫 공동묘지를 옮겨라
1968년 3월 중도일보는 보도를 통해 홍도동에 조성된 공동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사업이 시작돼 이틀 만에 유해 70여 기가 이장됐다고 타전했다. 함께 게재된 사진에는 흰 팻말이 박힌 묘지 앞에 여성이 서 있는 모습과 함께 "공동묘지 현장에서 묘지 1기당 1000원씩 이전비를 직접 주고 있는데 외지에 나가 있던 유족과 연고자들이 이장신청을 접수하고 있다"라고 설명을 붙였다.
홍도동 공동묘지에는 2만3000여 기의 분묘가 조성돼 있는데 대덕군 기성면 괴곡리 야산에 이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대전시 인구는 40만 명으로 주변 도시에서 인구를 흡수하며 도시팽창을 경험할 때다. 대전역 주변에 머물던 도시가 시세를 확장해 외곽으로 넓혀가던 중 공동묘지를 옮기고 주거지역으로 전환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된다. 대전시가 발행하는 시정백서에서 홍도동 공동묘지를 '도시발전에 암적 존재'라고 규정했을 정도다.
1970년 대전시정백서에 따르면 "대전역 북방 1.5㎞에 있는 화장장과 공동묘지는 도시발전상 암적 존재가 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축구장 22개 크기의 이곳 외에도 이때 복수동에 940기가 안정된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마동에 550기, 도마동에 1500기의 묘역이 있다고 1970년 시정백서는 기록했다.
▲화장장 철거 후 벌어진 일
대전에 화장장이 처음 조성된 것은 1935년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시설이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대전시정백서와 고 김보성 시장의 회고록 '질러가도 십리 돌아가도 십리'에서는 화장장이 1967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의 명분으로 철거됐다고 설명했다.
대전 공동묘지 전경과 1971년 폐지된 옛 대전화장장 모습. (사진=대전시제공) |
그러나 중도일보는 1973년 3월 '화장장 없는 50만 대전시'라는 기사에서 "1971년 3월 홍도동화장장이 폐쇄된 이후 현재까지 대전시 관내에 화장장이 한 군데도 없다"라고 밝혔다. 같은 달 또 다른 기사에서는 "1971년 시내 화장장이 있을 당시 통계를 보면 1월부터 3월 초까지 64구의 시체가 화장됐다"라며 "화장장이 폐쇄된 것은 1971년 3월이다"라고 명시했다.
화장장 없는 대전에 처참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1971년 5월 보도에는 공동묘지 이전 과정에서 발굴된 유해를 화장할 시설이 전무해 재건대가 동원돼 노천에서 시체를 화장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때 대전시는 예산 15만 원을 수립해 간이화장장을 설치하려 했으나 적은 예산 탓에 유찰됐고, 유족들은 발굴된 시체를 노천에서 화장 이장하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또 화장장이 없어 대전시민들은 유해를 앞세워 공주나 청주 화장장을 전전했고, 마침 무령왕릉이 발굴돼 인근에 있던 공주 화장장마저 이용할 수 없어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1973년 3월 중도일보는 지면을 통해 "이것은 대전시의 수치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힐난했다.
▲두 번 넘어지고 세 번째서야
공동묘지와 화장장을 새롭게 마련하는 일은 계획도시 대전에 큰 부담이었다. 시내 공동묘지가 이전돼 주거지역으로 개발되면서 1973년 대전에 남은 공동묘지는 복수동과 기성면 괴곡리 두 곳뿐이었다.
대전 공동묘지 이전사업 착수를 알리는 1968년 보도와 화장장 문제를 제기한 1973년 기사. |
1973년 3월 중도일보는 "대비책으로 대덕군 산내면 무수리에 공원묘지 후보지 12만 평을 선정해놓고 진입로까지 닦아놓았으나 예산이 없이 더 이상의 공사는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라고 전했다. 특히, 화장장은 주민들의 반발에 사업계획을 두 번이나 취소하는 수난 겪어 4년 만에 마련할 수 있었다. 대덕군 동면 신상리에 화장장을 건설하려 400만 원을 들여 공사를 추진해 화덕만 얹으면 완공되는 상황에서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됐고, 동구 상소동 만인산 계곡에 대체 부지를 마련해 진입로 공사를 앞뒀으나 이번에는 충남도경국장 감금 사태가 벌어졌다.
김보성 시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화장장 조성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충남도경국장을 국도상에서 포위하는 바람에 부산 소년체전 참관 중에 헬기로 급히 찾아가 화장장 건설을 취소하고서야 경찰국장을 귀청시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동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가 화장을 위해 수원까지 원정 다녀오는 사이 집에 두었던 전세금까지 도둑맞는 일이 벌어지면서 화장장 조성은 미룰 수 없는 현안이 되었다.
군용 헬기까지 동원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정림동 명암마을 울바위가 있는 지금의 자리를 선정했고, 보안을 유지하며 공사 끝에 1975년 12월 대망의 준공식을 가졌다. '사람이 이승에서 안고 있던 근심을 없애는 곳'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화장장 정수원에 대해 김보성 시장은 "화장장을 준공하며 가슴 벅찬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라고 회고록에 남겼다.
▲홍도총 찾는 일본인
홍도동 공동묘지를 이전할 때 많은 유해가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는 무연고 분묘로 구분됐다. 또 분묘 하나를 발굴했을 때 두 구의 유해가 나오는 곳도 상당하다고 1968년 중도일보는 전했다.
대전 추모공원 입구에 마련된 홍도총. 홍도동공동묘지에서 수습된 무연고 유해를 합동안장했다. |
1968년부터 대략 4년간 진행된 것으로 관측되는 홍도동 공동묘지 이전 사업에서 발굴된 무연고 유해가 1만3850기에 달하며 서구 괴곡동 대전추모공원 입구 홍도총에 합장됐다. 이곳에 2015년 한일시민네트워크 일본인 회원 18명이 방문했다. 한일시민네트워크는 일본 현지에서 발행된 소식지를 통해 1998년 최초 회원 40명 중 10명이 패전 후 대전에서 일본으로 넘어온 인사로 시작한 단체이고, 고향 대전에 대한 사랑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2015년 4월 대전 방문에 동행한 이들 중 3명이 대전이 고향이라고 밝혔고, 이들 중에는 대전에서 후지추 양조공장을 창업한 쓰지 긴노스케의 손자이자 2대째 운영자 쓰지 만타로의 아들 쓰지 요시 씨도 있었다. 한일시민네트워크가 발행한 소식지는 대전 홍도총에 일본인 유해 1500여 구가 한국인 유해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참배했다고 밝혔다. 홍도동 공동묘지가 누가 어떻게 조성됐는지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대전의 역사에서 규명할 부분으로 주목된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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