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을 설계·감리한 이상순옹이 촬영한 1959년 대전역사 모습 . 건물 왼쪽은 대합실 등 역사공간, 오른쪽은 대전철도청 사무공간이다. (사진=이상순옹 제공) |
▲재와 먼지 된 한밭벌에 대전역 우뚝
한국전쟁에 재와 먼지가 된 대전역사(驛舍)는 휴전을 맞이하고도 8년이 지나도록 다시 짓지 못했다. 나무 판잣집처럼 옹색한 몰골을 한 임시 대전역사는 도시 재건을 꿈꾸는 충남과 대전시민에게 두고두고 상처였다. 1956년 중도일보는 전쟁 중에 파괴돼 방치된 대전역의 모습을 묘사하며 '재건'을 강조했다. 당시 대전역은 하루 1만 7000여 명이 이용할 정도로 시민들의 대표적 교통수단이었으나 동란에서 파괴된 이후 임시역사에서 승객들이 오갔다. 임시역사는 원체 협소하면서 의자 한 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이용객들이 몸 둘 곳 없었다고 기사는 기록했다. 철도국 입구는 사람과 짐을 실어나를 우마차 대기공간으로 사용돼 가축 분뇨가 쌓여 있고, 특권층의 비호 속에 대전역 광장에서 노상행위와 철야영업하는 다방음식점이 산재했다. 승용차가 없던 시절 특수층의 집차가 통행금지시간을 이용한 비싼 영업행위를 벌인다고 65년 전 중도일보는 기사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중도일보가 판잣집 신세의 대전역을 수차례에 걸쳐 기사화했던 것은 당시 충남 대전시민들이 대전역사을 재건함으로써 '재건(再建)'의 상징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1958년 4월 보도에서는 중도일보는 지난 3월 착공 예정이던 대전역사 신축사업이 또다시 연기돼 5월에서야 가능하리라는 전망을 전하며 "6.25참상을 유독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는 대전역"이라며 짙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중도(中都) 대전시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음에도 판잣집 신세를 면치 못하고 하루 2만 명을 헤아리는 여객에게 상당한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는 게 그날 기사의 골자다. 이보다 앞서 1956년 11월 중도일보는 대전역을 조기배가 들어온 선창가에 비유하며 수라장을 이룬다고 곱씹었다. 이때 대전시 인구는 19만 명이었다.
1958년 전쟁 후 임시역사를 사용중인 대전역. 을유해방기념비 뒤에 나무로 지은 가건물 형태의 역사가 보인다. (사진=이상순옹 제공) |
전쟁 통에 파괴된 지 8년 만에 대전역은 복구 사업에 들어간다. 1958년 중도일보는 새롭게 지어질 대전역 조감도를 신문 1면에 그림과 글로써 게재했다. 아주토건회사가 낙찰받아 1차 공사비 6250만 환으로 1958년 6월 24일 착공한다고 소개했다. 또 3층 근대식 타일건물로 길이는 100m, 총평수 1060평이나 되는 충남과 대전시내 최대의 근대식 건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대전역사 건축에 들어가는 자재 중 원조 자재와 교통부 지급 자재를 합쳐 3억 2000만 환을 추산하는 대공사였다. 그로부터 1년 후 1959년 8월에 신축 대전역의 모습이 지면에 소개됐다. 당시 중도일보 취재기자는 대전역을 6.25전쟁때 회진(灰塵)되었던 곳이라고 소개한다. 회진은 재와 먼지를 말하는 것으로 폭격을 맞아 그만큼 철저하게 파괴되었음을 뜻한다. 새로 지은 대전역은 1959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준공하고 대전철도국이 새로운 청사에서 업무를 개시했다. 6.25전쟁으로 재와 먼지가 된 대전역을 1958년 6월 24일 1차 공사비 6250만 환을 가지고 착공해 이듬해 광복절인 8월 15일 준공한 것은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자 함이었을까.
▲준공 열흘 뒤 이승만 '플랫폼 인사'
1959년 8월 22일 대전역 준공식은 김학응 제6대 충남도지사와 정부부처 4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시민들의 축제처럼 치러졌다. 이때 참석자 중에는 유엔군 경제조정관실(OEC) 부랫드리 부단장도 있었다. 당시 보도를 보면 한화 3억 1270만 환과 외자 6300불의 총공사비를 들여 준공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때 준공된 대전역사는 방화 및 위생설비를 갖춘 철근 콘크리트 및 일부 철골조 3층 근대식 건물이었고, 3만 3000여 명에 달하는 노무자들이 동원되었다. 새로 지어진 대전역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찾아와 시설을 둘러보고 대전시민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1959년 8월 25일 이 대통령은 특별열차편으로 후란체스카 부인과 대전역에 도착해 플랫폼에 마련한 연단에서 환영 나온 대전시민에게 인사를 전했다. 당시 기사는 이렇게 인용한다 "대전 동포들, 이렇게 말머리를 꺼낸 이 대통령은 새로 세워진 대전역사를 즐거히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말이다.
이때 천안역도 함께 새로이 지어졌는데 준공식은 대전역보다 이틀 앞선 8월 20일 거행됐다. 천안역 역시 6.25동란으로 파괴되었다가 이번에 근대식 2층 건물로 준공된 것인데 이는 전년도 10월 1일에 착공해 9500만 환의 공사비를 소요한 것으로 1197평방미터의 규모라고 소개되었다.
그날 중도일보는 대전역 광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공연하는 가수들 사진을 함께 보도했다. 대전역 준공을 축하하는 시민위안의밤 행사가 열렸는데 준공식 당일 저녁 8시 30분부터 HLKI(KBS 전신)가 주관해 대한국악원 대전지원생의 고전무용을 비롯해 방송국 전속 가수, 신세기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들이 특별출연해 시민 3만 여명이 즐겼다고 전했다.
1958년 6월 중도일보가 신축 예정 대전역 조감도를 보도했다. |
"하숙가세요" 1960년 중도일보는 '밤길을 괴롭히는 요화군'이라는 기사에서 대전역 중동과 원동 일대에 난무한 사창가를 그렸다. '때로는 주객의 소매까지 부여잡고 싫지 않은 생떼도 쓰며 억지춘향극도 비저내는 이곳'이라고 표현한 대전역 사창가는 왜인들이 만든 잔재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기사는 "옛날 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청루의 유물로서 오늘까지 건재하고 있다"라며 기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여인들에게 해방은 언제 찾아오는지 묻고 있다.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화대라는 것이 500환이라면 그 액면마저 그몸의 수입이 못 된다고 한다. 오 할은 포주 그리고 중개비니 하는 착취가 있다고 하니 이보다 인신을 천시하는 사실이 또 어데있느냐 말이다. 억매인 노예. 제 몸과 제 마음을 구속하고 자유마저 없이 끼니를 이어가는 이들 요화에게 언제 햇빛이 비칠 것이냐."
1959년08월22일 대전역사 준공식 기사 |
▲서울서 부산까지 기차로 13시간
대전역은 삼남의 관문이자 부산과 목포까지 장시간 이어지는 운행에 쉼표 같은 거점이었다. 당시 중도일보가 전한 기차 시간표를 보면, 오전 6시 서울역을 출발한 제9호 여객열차가 4시간 50분을 달려 대전역에 10시 49분에 도착했다. 9호 열차는 대전역에 13분 정차 후 출발해 10시간만인 밤 9시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또 오전 9시 서울역을 출발한 제31열차(태극)가 대전에 3시간만인 낮 12시 8분에 도착해 12분 정차 후 다시 출발해 목표에 닿는 시간은 오후 7시 15분이었다. 65년 전 서울역 출발 대전역 도착 열차가 6회, 용산역발 1회, 천안역발 1회 각각 운행됐고, 서울을 출발해 대전을 거쳐 목포행 호남선 하행은 3회, 대전역에서 시작하는 호남선 하행 4회 각각 운행됐다. 1956년 중도일보에 게재된 기차 시간표는 삼남(三南)의 관문 대전역의 쓰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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