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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완석 목사(대전예술포럼 대표)가 중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건네는 말이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원로 예술인인 도완석 목사(69)가 2020년 대전문학상 수상 기념으로 <도완석 네 번째 시집-노을에 물들다>를 발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다재다능 팔방미인에 동안의 해맑은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인 도완석 목사가 어느덧 내년이면 70 고희를 앞두고 지난 생을 뒤돌아보며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도완석 목사로부터 69년 생애를 살아오면서 느끼는 소회들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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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 시는 이렇습니다. 지난해 12월에 쓴 '노을에 물들다'입니다.
문득 셈해 본 /내 나이에/소스라치게/놀랜다//일상이 분주해/인생의 흐름을/사소하게 여겼나 보다//분명 젊은 기억들/아직 난/청춘인 줄 알았는데/저녁 노을 빛/날 감싸고 있다//얼핏 좀 전에/난 누군가에게/자네라고/불렀던 것 같다//분명/예쁜 여자아인데/얼굴 붉히지 않고/내 가슴/두근댐 없이/웃음 지어 보인다//해질 무렵/어둠이 무서워/엄마 하고 울던 아이/어디로 갔을까//저녁 종소리/가슴에 담고/큰소리로 기도하던/소년은 어디로 갔지//릴케의 시 읊조리며/들 길 걸을 때/눈길 땅에 두고 걷던/그 어여쁜 여학생/언제 내 곁을 떠난거지//멈추어진 시간/머물러 있어야 할 그 자리에/내가 없다/갑자기 울고싶다/나를 떠난 아이처럼//움켜쥐고 싶은 바람/가슴에 담긴 추억들/세월의 흔적/그 그리움//나는 목마른 병사/사막의 여우처럼/홀로/해질 녁/이 노을 진 언덕을/서성인다//점점/빛바랜 한숨/어둠에/익숙해야 할 시간//차라리/저 노을 속으로/외로움 달래는/시간여행을/떠나보자//그리운/어머니 얼굴/착하고 영리했던/내 어릴 적 모습/사랑이 아팠던/청춘 찾아가기/그런 방황 속에서/눈을 감자//아마/내일 아침/햇살 밝은 광명이/날 깨워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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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보니 제일 많이 떠오르는 게 돌아가신 제 어머니입니다. 결혼 한지 이틀 만에 아버지를 전쟁통에 잃어버리고 홀몸으로 저를 낳아 키우시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시다가 돌아가시기 전 5년 간은 당뇨 합병증에 의한 치매를 앓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룰 때가 많습니다. 가족과 사회, 인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노을을 바라보는 곳에서 노을에 물들어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 조바심이 드는데 특히 내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글을 남기고 책을 남기고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겁니다. 저에게는 두 아들과 손자 셋이 있는데 큰 아들은 베트남 호치민에서 신한은행 부지점장이고 작은 아들은 미국에서 목회를 합니다. 큰 손자의 행동이 어릴 적 제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놀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손자들이 너무나 예쁘고 귀엽고 보고 싶어 늘 화상통화를 하고 사는데요. 제 시집에도 손자들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많이 담았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철학적인 것이 들어가는데 어떠한 삶이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늙은 꼰대들의 생각이 아닐까 반성도 해봅니다. 돌이켜보면 내 사회활동과 삶이 바쁘다고 어머니를 등한시하고 살았던 게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평생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는 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꿈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어머니는 6.25 때 군인이셨던 아버지와 신혼생활 이틀 만에 생이별하시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평생 만나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야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50년 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전쟁 후 새장가를 가셔서 이복동생이 여섯 명이나 있더군요.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이복동생들을 다 제 품에 거두고 지금은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TV드라마 대본 <길위의 초상>을 쓰느라 요즘 새벽 5시까지 글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삽니다. 제가 성남고 국어 교사 시절 제 제자이기도 한 팬앤터테인먼트 김희열 대표가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해와서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났을 때의 스토리, 제 양 어머니이신 대성학원 이사장 김신옥 목사님 이야기, 어머니의 숱한 고생 이야기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와 나의 삶의 여정 등을 <길위의 초상>을 통해 인생 이야기로 쓰다 보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정말 가슴 절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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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희곡작품 중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선정된 건데요. 봄은 어린 시절, 여름은 청년 시절, 가을은 중년 시절, 겨울은 노년 시절을 의미합니다. 시골의 한 소년이 6.25 때 부모를 잃고 누나를 고향에 두고 혼자 아버지를 찾으러 서울에 갔다가 자수성가해 유명한 판사가 된 뒤 갖은 고생을 뒤로 하고 살아온 누나를 찾아가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마리 퀴리>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받아 20회에 걸쳐 전국 순회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작품을 쓰고 연출한 <백제의 꿈>은 뮤지컬대상을 받게 됐지요. 놀라운 것은 제 큰 손자가 할아버지인 저의 외모와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큰 아들이 베트남에서 신한은행 부지점장으로 있다 보니 베트남 호치민에 살면서 베트남국제학교에 다니는 큰 손자는 바이올린 연주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데 아홉 살 꼬마가 이번에 그림이야기로 책을 내게 됐답니다. 큰 손자가 저에게 묻더군요. '할아버지, 하나님께서 저에게 체육, 음악, 책 만드는 일 등 많은 달란트를 주셨는데 제가 커서 무슨 일을 하길 원하셔요?' 그래서 제가 손자에게 '목사님이 되거나 UN 대사가 되어 불쌍한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하고 말해줬답니다. 큰 손자의 동생 작은 손자는 '저는 형만큼 재능이 없으니까 의사가 되어 형을 따라다니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게요'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린 두 형제가 아침마다 QT를 하며 성경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데 기특하고 대견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너무나 신기하죠. 큰 손자는 외모, 성격, 달란트까지 어쩌면 그렇게 저를 빼다 박았는지요(하하하). 사람들은 저더러 팔방미남이라고 하는데 못하는 게 너무 많죠. 신앙과 예술엔 관심이 많지만 체육은 아예 무관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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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음악, 미술, 무용, 연극, 문학 분야의 예술인들로 구성된 대전예술포럼을 만들었는데요. 작년에는 코로나로 주춤했지만 그 이전에는 평균 70여 명이 모였답니다. 제가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을 구성하는 달란트가 좀 있는 편이다 보니 모임이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게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서울영화사의 부탁으로 영화 품평을 해주고 있습니다. 영화사에서 일주일에 영화 10여 편씩을 보내오면 평론을 해주는 거죠. 영화 수입 여부를 제 품평을 듣고 결정한다고 합니다. 저는 돈벌이와 상관없는 일을 많이 하는데요. 관계를 맺고 재능기부를 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아내와 저는 평생 교직 생활을 하고 정년을 맞았으니 노후 연금으로 취미 생활도 즐기고 베풀며 살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아버지가 화가나 음악가인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대전의 모든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친하게 지내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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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박헌오, 손종호, 음악에 최남인, 미술에 정장직, 공연예술에 저와 정은혜 등과 평생 모임을 같이 하면서 대전의 문화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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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목사님은 후학들을 양성하는 바쁜 와중에도 미국 유학을 다녀오셨고, 다양한 장르에서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으신데요. 이에 대해 들려주실까요?
▲저는 한남대 미대 1회 졸업생이지만 국어를 복수 전공해서 국어교사로 대성고에 부임해 국어와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성남고 교사와 교장도 역임했죠. 한남대 겸임교수로도 오랫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삼성초, 보문중, 보문고와 대성고를 다녔는데요. 대성학원 이사장이신 김신옥 목사님께서 신학대를 가라고 하셨지만 영화 한다고 서울로 도망쳐 탤런트와 영화배우 생활을 하다가 붙잡혀 내려왔습니다. <개척자의 노래들>,<눈내리는 날에> 등의 작품을 써서 최불암, 박규채, 김무생 배우들을 초청해 연극을 했죠.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 위탁교육을 받고 교목 자격증도 땄습니다. 이후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가서 미국 오클라호마 Tulsa 시에 있는 명문 사립 ORU(오랄로버트 대학)에서 5년 만에 연극치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답니다. 제가 매우 날씬했던 사람인데 미국 유학 중에 가족이 너무나 그리워서 그리움을 달래려고 햄버거와 피자 등을 마구마구 먹다 보니 30kg이 늘어 배우생활은 포기했지요(하하하). 아이들이 보고 싶어 콜렉트콜 전화를 하면서 너무나 그리워 울기도 많이 했네요. 유학 다녀온 후 김신옥 이사장님께 성남고를 성남예고로 바꾸자고 제안 드렸고 음악 목사, 행정목사, 예술치료, 목회 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17권째 책을 냈는데 앞으로 매년 2권씩의 책을 내서 50권까지 내는 게 목표입니다.
감성과 감각을 잃으면 안돼서 시도 계속 쓰고, 역사를 소재로 한 희곡집도 계속 내려고 합니다. 대전 지역 이야기를 희곡과 시집으로 낼 생각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과 더불어 의욕이 있어야 되는데 글을 쓰다 보면 내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공부를 하게 되는 과정이 재미 있습니다. 남에게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 내 스스로 자족함을 위해 쓰게 된다고 할까요? 대중을 위한 상업성 없이 써내려간 책이 17권인데요. 이중 대학 교재가 <공연예술>,<도시미래의 꿈을 리모델링하라> 등 5권이 있습니다. 밤잠이 없다 보니 밤새 공부하고 기록하고 책을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습니다(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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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번 시집도 대전문학상 수상 기념으로 내게 된 것이지요. 2004년에 대전시문화상을 수상했고, 한국문화예술 예총 대상, 자랑스런 한국연극인상, 한국문인협회 올해의 작가상, 한남문학상 등 많이 받았네요.
이번에 한국희곡명작 40선에 들게 된 것도 영광입니다. 그런데 70을 앞두고 돌이켜보면 신약성경 베드로전서에 나온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씀이 실감 나고 허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잘한 것은 없고 못한 일만 마음에 걸리네요(하하하). 잘한 일은 신앙의 길을 걸었고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인데요. 못한 일은 어머님이 저에게 베풀어주신 만큼 효도를 못한 것입니다. 가족들의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덕을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남에게 상처도 많이 줬습니다. 젊을 때는 의욕이 앞서 이 모임, 이 기관, 이 사회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한 발짝 물러나 그들과 함께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원래 성품이 누구랑 싸우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렸을 때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는 게 싫어 누가 괴롭히면 피하고 차라리 맞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열 일곱 살 때 김신옥 목사님을 만났는데 목사님은 저에게 기도를 시켜보시더니 당장 그날부터 목사님 댁으로 들어와 살라고 하시더군요. 저를 양자 삼으려 하셨는데 제가 성남동 달동네에서 아프신 어머니 병간호도 해야 되고 새벽에 신문도 돌려야돼서 못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죠. 어머님이 시장에서 물건 파시던 이야기는 <내 인생의 동화>와 <오후 6시반의 초상>에 나와 있지요. 저의 자전적인 희곡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길 위의 초상>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병행해서 썼습니다. 저의 생은 참으로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 극도로 궁핍하고 가난했던 제 생활이 결혼과 동시에 풍요로워졌거든요. 하루 한 끼를 걱정하던 시절을 지낸 제가 대성고 교사 시절 만난 아내와 결혼하면서 유학도 다녀오게 되고, 따뜻한 가정도 이루게 되고 감사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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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미국 필라델피아의 워십센터처럼 크리스천 컬처센터 처치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성서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극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극단 이름은 창세기 1장1절에 나오는 '태초에'의 '태'를 따고 요한계시록 마지막 문장 '아멘'의 '멘'을 따서 '태멘'극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두번째는 대전의 역사를 희곡화해서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백제 무령왕 이야기, 송시열과 송준길 이야기, 박팽년 이야기, 망이 망소이 이야기 등 대전의 역사를 써서 무대에 올리고 싶고, 자전적인 이야기도 드라마와 연극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목사로, 예술가로, 극작가로, 연출가로 살아온 저의 소명을 집대성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술과 신앙을 결부시켜 기독교적인 문화 창달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습니다. 지역 문화발전을 위해 제 재능을 기부하고 싶은 거죠.
연출, 희곡작가, 평론, 배우 역할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뭔가 보람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싶습니다. 수상 뮤지컬 '갑천'을 저의 대표작으로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많은데 하나의 단계였습니다.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제 예술인생의 집대성을 위해 꾸준히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국장 겸 편집위원 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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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출생이지만 대전에서 5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와 대전 토박이나 다름없다.한남대 미술교육과 1회 졸업생으로, 국어국문학을 복수 전공했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고 미국 오클라호마 Tulsa 시에 있는 명문 사립 ORU 대학에서 목회신학(예술치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남고 교장과 한남대 대학원 겸임교수로 오랫동안 교직에 머물며 대전연극협회장, 한밭문화제추진위원장, 제23회전국연극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연극평론가, 작가, 연출가 등 다 방면에서 50년 넘게 예술 활동을 해온 공적으로 대전문화상을 비롯해 자랑스런 한국연극인상, 공로상, 예총예술대상, 올해의 작가상, 2020년도 대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는 희곡 <베들레헴의 꿈>,<도완석 창작희곡집 1,2,3,4집>,연극평론집 <무대와 예술>,<도시미래의 꿈을 리모델링하라>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하늘아래 땅 위에서>,<내 인생의 동화>,<이집트여행>,<노을에 물들다> 등이 있다. 대학교재로는 <공연예술>,<충남근현대예술사/연극, 희곡문학편>,<대전연극 60년사> 등이 있다. 현재 대학 출강과 함께 대전예술포럼 대표로 활동하면서 왕성하게 작품들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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