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50주기를 하루 앞둔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전태일 3법' 입법을 촉구하는 조형물이 설치돼있다. 사진=연합 |
나는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였다.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뛰었다.
가정형편으로 늦게 학교에 들어갔지만, 배우는 게 좋았다. 일을 배우면서까지 학교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지. 2남 1녀 중 맞이로 태어난 나는 새벽엔 구두통을 들었고, 낮엔 봉재 시다, 밤엔 껌까지 팔았다. 현실은 더 가혹했다.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점심은 굶었고, 나뿐 아니라 우리 또래는 화장실만 가려 해도 욕을 먹고 매까지 맞았거든.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왔다. 우리는 우리를 바보라고 불렀고, 1969년 이 바보들이 모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위해 투쟁하는 ‘바보회’를 만들었지.
우리는 투쟁했다. 바보회를 ‘삼동회’로 바꾸고 시위를 하려 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그리고 나는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불꽃으로 산화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했던가. 벌써 50년이다. 다섯 번의 강산이 바뀌었다. 지금의 후배들에게 묻고 싶다. 잘 지내고 있니?
전태일 3법 외치는 민주노총 대전본부. 중도일보 DB. |
선배님께서 가신 이후 우리 사회엔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동 현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게 중론입니다. 충청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벽은 높고, 여전히 암담합니다.
지난 2018년 태안화력에선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발전소 안에서 컨베이어벨트 밑에 쌓인 석탄을 긁어모으다 숨졌습니다. 작업 중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등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산업재해 사망률 세계 1위 국가란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가 부각됩니다. 지난달 29일 대전에선 한진택배 노동자가 대전터미널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가 결국 사망했습니다. 올해만 과로로 사망한 택배 노동자가 1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대책이 중요한 데 갈 길이 멉니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법이 우선입니다. 노동자의 사망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사용자나 경영책임자를 무겁게 처벌하는 내용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제정이 지난 19대 국회에서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발의했지만,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습니다. 올해 중대재해법에 대한 움직임이 빨라지곤 있지만, 각 정당의 입장이 달라 논의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편지를 기억합니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를 지키기엔 아직 열악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조훈희 기자 chh7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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