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김재순 미망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묘비를 닦고 있다. 이성희 기자 token77@ |
1950년 20살 되던 해 5월 결혼하고 다음 달 남편을 전쟁통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전쟁 후 절름발이로 돌아온 남편인 이철순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김재순(90) 할머님이 했던 말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김재순 할머님이 속한 전몰군경미망인회 충북지부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참배했다. 코로나19 사태에 단체 참배 규모를 축소하고 전사자 미망인 대부분 연령대가 높아 6·25 참전 용사 전사자 유족 대표로는 김 할머님만 참석했다.
현충탑과 묘역 참배 행사를 마친 뒤 부군의 묘역에 개인 참배하는 김재순 할머님을 만났다. 오대산 전투 당시 다리에 박힌 포탄 파편을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부군 어르신의 사연을 들려주는 김재순 할머님의 눈엔 눈물을 고였다.
할머니는 "우리 영감이 6·25 전쟁에 참전하고 오대산 폭격에 양다리를 다 잃을 뻔했데요. 시체로 된 산을 넘어 절간으로 도망가서 9일간 스님이 숨겨줬고, 9일간 도토리 밥만 먹으면서 생명 부지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 돌아왔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게 할머니의 얘기다.
김 할머니는 "전쟁 끝나고 평생 그렇게 몸 아파서 고생하다가 2010년에 돌아가셨어요. 딸, 아들 4명 낳고 기르면서 불편한 몸 때문에 마당 한번 쓸지 못했어요. 우리 영감이. (그래서 내가) 애들 밥 안 굶기려고 별의별 일을 다 하면서 고생 정말 많이 했어요"라고 했다.
이어, "생활이 너무 어려워 주변에 도와달라고 말하면 요양원으로 보내면 좀 좋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내 남편이고 애들 아버진데 평생 내가 같이 살아야지 하면서 버티고 버텼다"고 했다.
이야기 나누던 중 부군이 돌아가시던 날을 떠올리며 김 할머니는 다시 그치지 않는 눈물을 보였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7년간은 몸이 워낙 불편하니 누워만 계셨어요. 그러다가 돌아가시기 전날엔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그대는 오래 살다 와'라며 손을 잡아줬던 모습이 기억이 나요"라고 차오른 눈으로 부군의 묘역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혹시 부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말에, "나는 애들 때문에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는데, 그대는 평생 아프다가 가서 어떻게 해. 아무쪼록 언젠가 부르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라고 했다.
한편, 국립대전현충원엔 9만여 명의 묘역이 안장돼 있으며, 이중 6·25 전사자는 6345명이다. 3만 8271명의 위패도 모시고 있다.
이현제 기자 guswp3@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