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아는 것이 힘이다' 정진호 PD가 제작한 '70년 만의 나들이' 캡처. |
2. '민간인 학살 보도' 기자 앨런의 발자취
젊은 시절 앨런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영국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가 벌어진 곳에 그날의 기억을 잊지 말자는 의미의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임효인 기자 |
취재팀은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영국 런던 등지에서 한국전쟁과 산내 민간인 학살을 최초 보도한 앨런의 발자취를 좇았다. 지난 1983년 영면한 앨런은 칼 막스가 잠들어 있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곁에 뿌려졌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는 영국 날씨도 이날만은 화창했다. 앨런은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자신이 생을 마감하면 화장해 칼 막스 곁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엔 실제 막스가 묻힌 작은 비석과 막스를 기념하는 커다란 상징 조각물이 있는데 앨런이 뿌려진 곳은 작은 비석 근처다.
영국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내 칼 막스가 잠들어 있는 곳. 앨런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 이 근처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
이러한 앨런의 삶에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소속 특파원으로 한국에 방문한 앨런은 그해 8월 '한국의 미국 벨젠'(U.S BELSEN IN KOREA)라는 제목으로 전쟁과 관련한 첫 보도를 내보낸다. 벨젠은 독일 나치수용소 소재지로, 전쟁 발발 후 미국이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고 있다는 내용을 폭로했다. 이후 9월 앨런은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16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를 제작·배포했다. 참혹한 민간인 학살을 목격한 앨런은 그 상황과 배경을 소상히 기록했다.
이후 앨런은 조국과 다른 이념을 옹호하고 진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로부터 내쳐진다. 민간인 학살에 미군이 개입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매우 첨예한 대립을 겪었던 시기였기에 영국 정부는 앨런의 여권을 무효화시켰다. '데일리 워커'를 비롯해 영국의 많은 정치인이 반발하며 영국 정부에 항의했지만 이후 앨런은 20년가량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눈앞에서 본 민간인 학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을 앨런에게 조국이 준 상처까지 당시 앨런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고 지난 6월 대전을 방문한 그의 첫 번째 부인 에스터(Esther Samson)는 회고했다.
앨런은 이후 전쟁 기간 중 결혼한 부인 에스터와 두 아들과도 이별하게 된다. 가족과 중국에서 동독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둘째 아들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자신을 제외한 가족이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홀로 동독에서 생활하던 앨런은 새 가정을 꾸렸지만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늘 안고 살았다. 1949년 영국에서 떠난 앨런은 20년 후에나 돌아갈 수 있었다. 셰필드대학에 보관 중인 자료는 그의 두 번째 부인 우슬라가 10여 년 전쯤 기부했다.
영국에서 만난 앨런의 가족들은 그의 삶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존경했다. 앨런의 손주 존(Jon Allan Francis)은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나서 볼 수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는데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며 "그가 했던 것을 알게 됐을 때 매우 놀랐고 또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된 것은 슬펐다"라고 전했다. 런던=임효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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