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은 청소년과 사회인의 중간단계, 정확하게는 어른 인턴기라 해도 무방한 세대다. 하지만 독립운동도 민주화의 불씨도 모두 '대학생'이라 부르는 미성숙한 어른들이 일궈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누군가는 기말고사를 포기했고, 누군가는 밤새 대자보를 쓰고 붙이며 최루탄 가스를 들이마셨다. 자신의 의지가 시키는 대로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고자 했던 1987년, 그 시절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편집자 주>
(상) 굴복 될 수 없는 민중의 투혼
1987년 9월 7일 발행된 충남대신문에 실린 사진. 교내를 나와 대전역으로 향하는 충남대 가두행진 모습이다. |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 맞고 쓰러지자 대전에서도 민주투쟁의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이광진(목원대 신학과 84학번) 경실련 사무처장은 "그 전부터 대전에서도 시위와 집회는 있었다. 6월에 전국적 상황으로 번지면서 대전도 같은 선상에서 활동을 해 왔다"며 "결정적인 계기는 충남대 학우들이 경찰을 뚫고 유성에서 대전역으로 넘어오면서다. 당시 목원대는 목동에 있었는데 계룡로를 지나던 충남대 학생과 합류해 대전역까지 진출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충대신문은 "총학에서 6.10대회 이후로 2주간 기말고사 연기하며 군부독재 끝장내자, 라는 구호를 내걸고 학생들의 호응을 촉구할 때도 처음에는 학생들이 작년 중간고사 거부로 인한 결과가 사실상 실패했고, 학점상 많은 불이익 돌아왔기 때문에 주저함이 선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세 상황은 변해갔다. 6월 12일 기말고사 연기를 연기해 6·10대회 정신을 계속 계승 투쟁해 나가자는 결의 이후 도서관 학생들도 점점 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보다 정국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문과대학생회장이었던 양동철(충남대 국문과 84학번) 씨는 집회를 주도한 주역 중 하나다. 그는 "시험거부는 대부분 학과가 동참했다. 의대가 마지막으로 집회에 참석했는데 우리는 서문, 정문, 농대 세 갈래로 나눠 경찰망을 뚫고 유성으로 나올 수 있었고, 대전역까지 진출했다"고 말했다.
충대신문 9월 7일자 지면에 실린 사진. |
이광진 경실련 사무처장은 "서울에서는 점심시간을 이용한 화이트칼라 중심의 시위나 민주화운동을 하던 청년 단체에 일반인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전의 경우 주 동력은 대학생"이라고 말했다.
1987년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명백히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대전을 포함한 전국적 투쟁은 결국 6·29 선언을 이끌어 냈다.
충대신문은 "6·10대회의 배경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에 기생한 현정권의 부도덕성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폭력정치의 한계성, 개헌논의에 대한 그들의 기만적 술책들에 국민들은 더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지영 (사)대전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처장은 "6월 10일 이후 진행되었던 민주항쟁은 군사독재 권력으로부터 민주주의 이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를 획득하게 했다. 그것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연내 대통령선거,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을 포함한 정치범·양심범의 사면복권, 국민의 기본권 신장, 언론의 자유 창당, 지방자치제 실시와 대학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였다"고 해석했다.
이해미·김유진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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