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제주 4.3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 |
매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은 힘을 잃어
그저 혼돈만이 세상에 풀어진다.
핏빛 얼룩진 조수가 풀어지고
순결한 기쁨은 도처에서 물에 잠기며
가장 선한 무리는 신념을 잃고
가장 악한 무리만이 열정에 가득차서 널뛰는구나.
분명 어떤 계시가 눈앞에,
재림이 확실히 눈앞에 다가왔다.
재림!이라고 말을 하자마자
세계의 혼으로부터 이탈한 어떤 거대한 형상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사막의 어딘가에서
사자의 몸, 인간의 머리를 한 어떤 형상이.
태양처럼 무자비하고 텅 빈 응시가
다리를 느리게 움직일 때 그 주변 모든 것은
분노한 사막 새들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또다시 어둠이 내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돌같은 잠 속의 스무 세기가
흔들리는 요람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것을,
그리고 사나운 한 짐승이, 마침내 그 시간이 되어,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걸음을 떼는 것을.
'나는 가련다. 이니스프리로 가련다. 오두막집 짓고 벌들이 윙윙대는…' 청소년 시절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를 리듬을 살려 암송하곤 했다. 예전에 내가 아는 예이츠의 시는 '20세기 낭만주의 시인'이란 닉네임에 걸맞게 자연을 찬미하는 소박한 시였다. 그러나 예이츠는 알수록 독특한 시인이다. 쉬운 시를 썼는 가 하면 난해한 시도 있다. '재림'은 기독교적 분위기가 가득한 시다. 1차 대전 후에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시가 21세기의 지금에 적용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도처에는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지구 이쪽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며 안락한 잠자리에서 달콤한 꿈을 꾸는 사이 저쪽에선 폭탄이 터지고 핏물이 고랑을 이룬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아이들의 겁먹은 눈은 감기지 않는다. 시리아 내전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이제 시리아는 강대국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왜 선량한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가.
동백꽃이 남도의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선혈이 낭자한 제주의 섬을 떠올린다. 제주 4.3은 말해선 안되는 금기어였다. 제주 4.3은 미 군정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도 남로당 무장대와 경찰 토벌대가 무력 충돌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붉은 섬' 제주도는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혔다. 피해자는 피해자라고 토로할 수 없었다.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천형이었다. 국가 폭력 앞에 맞선 대가는 그만큼 참혹했다. '(까마귀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 먹다가…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 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덩어리만씩 큼직큼직해시니까.'
올해는 제주 4.3항쟁 70주년이다. 아름다운 섬 제주는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우리는 제주 지하 어딘가에서 통곡하는 원혼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들의 공포와 살이 찢기는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악인일까, 선인일까. 예이츠는 악몽의 세계를 간파했다. '가장 선한 무리는 신념을 잃고 가장 악한 무리만이 열정에 가득 차서 널뛰는구나'. 무간지옥을 심판하는 자 누구인가. 재림의 그 날이 올까.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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