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교육원에 설치된 고 나성주·장진희 경사 부조상 앞에서 송균헌 경위가 19년 전을 회상하고 있다. |
송 경위는 19년 전 그날 부여경찰서 교통조사계 경장으로 근무하던 중 부여대간첩작전에 투입됐다.
북에서 넘어온 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 대남공작원 2명이 부여 정각사에 출현했고, 무장한 상태서 국정원 및 경찰 보안수사대원과 한 차례 총격전을 벌인 직후였다. 도주한 무장간첩의 이동로를 차단하는 게 송 경장의 임무였고, 실탄을 장전한 칼빈을 두 손에 쥔 송 경장 옆에는 나성주(당시 30세) 순경이 있었다.
부여서에서 비상출동한 경찰 8명이 2인 1개조로 100m 간격으로 석성저수지 주변에 잠복했다. 송 경장은 나 순경과 함께 엄폐물을 찾아 태조봉 아래 냇가를 따라 걸어가던 중 배수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무장간첩 김동식과 7~8m 앞에서 마주했다.
▲ 송균헌 경위 어깨에서 2009년 빼낸 1995년 간첩 김동식의 탄두. |
김동식의 권총에는 소음기가 부착돼 '딱, 딱'나무 문짝을 두드리는 정도의 소리만 났으나, 총알은 두 경찰을 향해 달려들었다.
송 경장은 “나 순경이 나보다 옆에 있었고, 간첩 김동식은 수미터 전방 수로에 몸을 숨기고 사격을 가해왔다”며 “엎드린 채 몸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르며 대응사격하는 동안 김과 김과 수차례 눈을 마주첬다. 적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전에 들렸다”고 기억했다.
총격전 와중에 송 경장은 오른쪽 어깨에 무엇인가 맞은 듯한 짧은 통증을 느꼈지만, 총알에 튄 돌멩이 정도로 여겼다.
무장간첩과 총격전은 송 경장이 칼빈 탄창 2개를 바꿀 때까지 이어졌고,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동료들이 지원사격을 하면서 김동식은 수로에 몸을 숨기며 뒤로 후퇴했다.
김동식을 뒤쫓으려 몸을 일으킨 송 경장은 앞에 엎드린 나 순경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송 경장은 총을 겨눈 자세로 멈춘 나 순경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나 순경은 목을 가누지 못했다.
나 순경은 김동식이 쏜 총에 머리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나 순경은 병원 이송 후 14일 만에 숨을 거뒀다.
송 경장은 “나성주를 끌어안고 총을 건네받으려하자 '야! 총 자동이야'라며 동기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지막말을 남겼다”고 기억했다.
이후 무장간첩 김동식은 초촌산 쪽으로 수백미터를 더 도주하다 뒤쫓아온 부여서 장진희 순경 가슴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고, 장 순경은 현장에서 순직했다.
종아리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황수영 순경 등에 생포된 김동식은 북에서 1981년 대남공작원으로 차출돼 15년간 훈련받았고 1990년에 한 차례 남한 공작을 수행한 요원으로 확인됐다. 또 함께 도주한 무장간첩 박광남은 군과 총격전 중 사망했다.
송 경장은 동기생을 눈앞에서 잃은 기억과 또다른 동료가 희생됐다는 생각에 십수년 동안 혼자 괴로워했다.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었고, 없었던 일이라고 부정하고도 싶었으나 주먹을 쥘 수 없는 무기력증은 수시로 찾아왔다.
총알이 스쳤던 것으로 여겼던 어깨 상처가 사실은 총알이 몸에 박힌 상처라는 걸 안 2009년 마음을 다잡았다.
송 경장은 이 순간 숨을 쉬는 게 동료 경찰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부여대간첩사건에 몸을 던져 희생한 동료 경찰관 두 명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도록 노력하는 게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찰청에 '추모경찰관'으로 추천하고 찾아다녔다.
드디어 경찰청이 선정하는 '10월 추모경찰관'에 나성주·장진희 경사가 2012년 나란히 선정됐고, 당시 정용선 충남경찰청장은 2012년 호국충남경찰사에 게재하고 올 6월 경찰교육원 보안경찰교육센터 입구에 두 경사의 청동 부조상을 세웠다. 그곳에는 송 경위 어깨에서 2009년 1월 빼낸 총알도 함께 했다.
송 경위는 “19년 전 10월은 충남경찰이 경찰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죽음에 맞섰던 시기”라며 “부여간첩이 아니라 앞서간 나성주·장진희 경사의 희생이 먼저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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