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1. 비상하려는 봉황의 꿈, 백제금동대향로
2. 룽먼석굴(龍門石窟)에 남겨진 백제인의 흔적
3. 서산마애삼존불과 백제인의 미소
4. 부여 정림사와 뤄양 영녕사 소조상
5. 사비도성과 난징(南京)의 건강성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7. 백제 유민들의 흔적
8. 백제문화 탐구의 새로운 모색
9. 사진으로 보는 중국속의 백제문화
10. 시리즈를 마치며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지난 1971년 7월 공주 송산(宋山)의 왕릉 계곡에서 6호분 배수구 공사 중 왕의 무덤이 발견됐다. 널길 바닥에서 왕의 묘지와 매지권 및 왕비의 묘지를 새긴 지석 2매가 발견됨은 물론 26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공주 무령왕릉은 세상에 알려졌으며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장면을 이어주고 있다.
백제문화의 국제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무령왕릉은 중국 육조시대(265~589년)의 묘제와 같아 계보적인 연원이 중국에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아치형 천정을 구축한 무덤은 중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백제만의 독창적인 사례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물론 중국 육조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인 주연묘에서 아치형 지붕을 채용한 사례는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주연묘 및 육조석각 등을 통해 중국 묘지문화와 무령왕릉의 독창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특히 마안산시가 지리적으로 난징과 가까운 위치로 인해 문화계승에 있어서 닮은 점이 많은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 1984년 발굴된 주연묘는 한 무덤 안에 주연의 관과 부인의 관이 함께 안치돼 있다. 무령왕릉의 경우 왕과 왕비가 함께 안치돼 있는 것과 흡사하다.
무령왕릉과는 달리 아치형 무덤은 아니지만 아치형 지붕 쌓는 방법은 3세기 때 이미 주연묘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네 벽의 중간 부분부터 시작해서 양단의 위로 쌓아올려 인(人)자형의 벽면이 되게 만들어 뾰족한 사각형을 만들었다. 주연묘는 오나라 시대 묘 가운데 비교적 일찍 아치형지붕을 채용한 사례다.
무령왕릉의 문이 1개인데 비해 주연묘는 2개의 문으로 돼있다. 이곳에서는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채색청자기를 비롯해 청자반구대, 청자양, 청자호자, 청자향로 등 모두 50여 종의 부장품들이 출토됐다. 칠기 종류만 80여점에 달한다. 백제시대 유물들과 흡사해 당시의 문화적인 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마구간과 돼지우리 등 가축과 가축우리를 흙으로 만들어 무덤에 함께 매장했으며 진묘수와 동다리미 등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출토된 부장품들도 눈에 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와는 달리 짐승얼굴에 사람 몸을 한 청자진묘수다. 두 눈은 밖으로 튀어나오고 두 귀는 머리위에 있으며 내민 혓바닥은 땅에 까지 닿는 등 다소 흉측한 형상이다. 안휘성 마안산 동오묘에서 출토된 석지권(錫地券)의 경우 무령왕릉의 매지권과 흡사하다. 3행 91자로 기록된 석지권에는 `오나라 분위(직급의) 장군이 회계군에 사는 맹윤이다. 죽은 맹윤을 위해 아들 맹일이 단양 마두산 무덤 일대를 샀다. 동쪽으로는 큰 길이 있고 서쪽은 산끝까지다.
남북 좌우로 길이가 50장(丈151m)을, 값으로는 50만 위안이다. `봉황 3년 8월 19일'이라고 날짜까지 적혀있다. 오나라 시기인 서기 274년에 만들어진 무덤인 것이다.
석각은 이들 무덤 밖에 세우는 조형물로 석주(石柱), 석수(石獸), 석비(石碑) 등으로 꾸며진다. 이 가운데 하나인 숙회묘 석각은 양무제의 아우인 숙회가 51세 되던 526년 숨지자 건강성에 조성해 놨던 것이다. 높이 3m, 몸길이 3m로 두 마리의 사자형상을 했다. 숙회묘 안내표지판에는 `숙회묘 앞에 있는 돌 용의 9번째 아들 피사 두 마리'라고 표현했다. 앞 가슴위로 드리워진 수염자국, 앞다리와 뒷다리에 새겨진 구름 문양, 앞뒤다리 사이의 몸통에 달린 날개 등 상상속의 동물에 대해 중국인들은 `석피사'라고 칭한다.
▲고대 동아시아 문화 아우르는 백제무덤=무령왕릉은 수천 개의 벽돌을 쌓아 올려 조성한 벽돌무덤이다. 이 같은 벽돌무덤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자리 잡았던 서북지방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 고유의 특성을 지닌 무덤은 돌, 나무, 흙 등을 이용한 무덤이다. 그러다가 무령왕릉에서 갑자기 벽돌무덤의 형태가 드러난 것이다.
이 같은 점을 비춰볼 때 무령왕릉의 축조에 중국의 무덤문화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특히 백제가 남조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을 비춰볼 때 더더욱 그러하다. 무령왕릉은 이처럼 중국문화를 모방하면서도 백제 나름대로의 과학성과 독창성 및 백제적인 정신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무령왕릉은 28가지의 벽돌 수천 개를 이용해 쌓아올린 무덤이다. 정확한 설계도가 없으면 쌓기 어려운 무덤인 것이다. 특히 백토와 모래 물을 섞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아치형 무덤은 남조시기의 무덤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을 정도의 과학성과 독창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무덤의 부장물에서도 백제적인 문화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무령왕릉의 널길 한 가운데에서 발견된 진묘수는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물론 국내 고대 무덤에서도 널길의 좌우 벽에 그림으로 괴수(怪獸)를 나타낸 예는 있지만 이처럼 진묘수를 제작해 세운 예는 없으므로 이 유물의 유례는 역시 중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무령왕릉의 석수는 머리에 뿔이 있고 날개를 형성한 무늬가 달려있다. 중국 진묘수들의 뿔의 형태는 다양하다. 주연묘의 진묘수가 동물 얼굴에 사람 몸을 한 진묘수라면 당나라시대에는 사람얼굴에 동물 몸 형상의 진묘수 등 갖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진묘수 뿔의 형태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무령왕릉 부장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다름 아닌 환두대도(環頭大刀)다. 최초의 금속기인 청동으로 검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칼은 무력 그 자체였고 지배력의 상징이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베는 칼인 도가 주로 사용되는데 둥글게 처리된 끝부분에 끈을 묶어 손목에 감싸 전투 시 떨어뜨리지 않도록 고안된 칼을 둥근고리자루칼 즉 환두대도라고 부른다.
이 고리에 용이나 봉황 같은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동물을 장식할 때 그 칼은 최고 권력을 상징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환두대도는 화려함에서 그 무엇과도 비할 바가 없다. 특히 남조의 무덤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아 특징적이다. 한반도를 통일하고 동아시아로 뻗어나가고자 했던 백제인들의 기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공주박물관 강원표 학예연구사는 “남조의 벽돌무덤양식을 백제에서는 유행시키지 않고 곧바로 석실무덤에 아치형 천장을 접목하는 등 백제적 무덤으로 변환시킨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부여박물관 이용현 학예연구사는 “무령왕릉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중국의 다양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실생활에 적용함은 물론 일본 등 주변국에 전파하는 등 동아시아의 허브적인 역할을 한 고대국가가 바로 백제”라고 지적했다. /난징=글 박기성·사진 김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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